고려인 빨치산 ( ←partizan)

근대사
단체
1910년대 말∼1920년대 초에 소련 극동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한인 무장투쟁 단체.
정의
1910년대 말∼1920년대 초에 소련 극동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한인 무장투쟁 단체.
개설

러시아 혁명 전후에 사회주의 한인 무장투쟁 세력이 소련의 극동 지역에서 일본군에 맞서독립운동을 펴나가려고 조직하였던 단체이다. 일본의 대륙 진출 야욕을 응징하면서, 소련의 연해주(沿海州)·아무르주(Amur州) 일대의 지배를 도왔다. 1937년에 대부분 강제 이주된 뒤에는 중앙아시아 한인 사회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설립목적

1910년대 말에 소련 연해주에는 사회주의 한인 독립운동 세력들이 활동하였다. 이들은 한국을 식민지배하면서 소련을 침략한 일본과 일본을 지지하는 반혁명세력인 백군(白軍)을 공동의 적으로 생각하였다. 곧 일본 군대는 물론 백군과 맞서 싸우는 것이 소련을 수호하고 한국의 독립을 되찾는 길이라고 여겼다.

1918년 4월에 일본을 비롯한 미국, 영국, 프랑스 군대가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를 시작으로 소련의 연해주를 점령하였다. 볼셰비키(Bol’sheviki)를 지지하였던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은 한인 적군(赤軍)을 조직하여 볼셰비키 적군과 함께 백군에 대항하였지만, 9월에 연해주 소비에트(Soviet) 정권이 붕괴되고 극동 지역은 백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 뒤 사회주의 한인 독립운동 세력과 적군 세력은 무장 투쟁을 위해서 빨치산(partizan) 부대를 조직하였고, 부대를 여럿으로 나누어 연해주와 아무르주 지역에서 저항하였다.

연원 및 변천

최초의 한인 빨치산 부대는 러시아 아무르주에서 창설되었다. 곧 1918년 10월에 박 일리야는 아무르주 블라고베셴스크(Blagoveshchensk)에서 빨치산 부대를 조직하였고, 다반에서는 최 니콜라이가 중심이 되어 빨치산 부대를 결성하였다. 특히 최 니콜라이의 빨치산 부대는 세브츠크가 지휘하는 러시아 빨치산 부대와 연합하여, 아무르 철도의 인역(驛)에서 백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 뒤 연해주에서도 한인 빨치산 부대들이 조직되었다. 곧 275명이 소속된 철혈단(鐵血團)이 전체회의 결정에 따라 수찬(Suchan)에서 빨치산 부대를만들었으며, 수이푼에서는 최호림(1896~1960)과 김하정이 각각 빨치산 부대를 조직하였다.

1919년∼1920년 초에 극동 지역에서는 많은 한인 빨치산 부대들이 활동하였다. 특히 적군이 바이칼(Baykal) 일대로 진격해오자, 인민혁명군으로 재편되어 ‘극동 지역 해방’이라는 임무를 수행하려고 하였다. 1919년 12월에는 니콜라옙스크나아무레(Nikolaevsk-na-Amure), 1920년 2월 5일에는 블라고베셴스크, 1920년 2월 13일에는 하바롭스크(Khabarovsk) 등지에서 해방 전투에 참전하였다. 1920년 4월에 일본군이 한인 마을인 신한촌(新韓村)에서 학살을 자행하였고, 자유시에서는 한인 빨치산 부대 사이에 무장 충돌이 일어났지만, 한인 빨치산 부대들은 곳곳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그 뒤 한인 빨치산 가운데 상당수는 소련 정규 군대에 편입되어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기능과 역할

1917년의 러시아 혁명 이후에 한인들은 조국이 되어 버린 소련에 대한 대단한 의무감과 충성심을 가졌다. 자연히 한인 빨치산 부대에 속하였던 한인 젊은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1937년의 강제이주 이전까지 대체로 적군의 중급 및 고급 지휘관으로 복무하기도 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에 군사지식을 가지고 작전에 참여하여 능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다만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선발되어 북한에 파견되었는데,1950년대 중반 이후에 권력 투쟁이 벌어지자 대부분 소련으로 귀국하였다. 귀국한 빨치산 가운데 대부분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정착해 살면서 한인 사회의 지식인이나 엘리트로 활동하였다.

의의와 평가

고려인 빨치산은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 민족 자치와 자결을 내세웠던 초기 볼셰비키 정권을 지지하였다. 따라서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민족 자치가 보장되었던 레닌(Lenin, 1870~1924) 통치기에는 민족 공산당 활동을 적극적으로 펴나갔다. 하지만 스탈린(Stalin, 1879~1953)이 민족 자치를 폐기하고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자, 1930년대 초반에 대대적으로 숙청되면서, 1937년에는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고 말았다. 다만 중앙아시아의 여러 국가가 한국과 본격적으로 교류하면서, 이들은 한국에서는 접하기 어려웠던 한국 근현대사의 여러 사건에 대한 실상을 공개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21―국외 3.1운동―(김병기·반병률,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3)
『재외동포총서』7―러시아·중앙아시아 한인의 역사 (상)―(국사편찬위원회 편, 국사편찬위원회, 2008)
「시베리아내전기 러시아지역 한인의 군사활동: ‘한인사회당 적위군과 ’에호한인부대‘를 중심으로」(윤상원,『한국민족운동사연구』66, 2011)
집필자
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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