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김만삼은 소련에서 카자흐공화국으로 강제이주를 당하여 아들 김홍빈과 함께 선봉 콜호즈를 세웠으며, 벼농사 확산 및 품종 개발에 기여한 고려인 지도자이다. 1928년∼1929년에 소련은 산업 집단화를 추진하였는데, 이 때 김만삼은 연해주에 설치된 벼농사 콜호즈에서 활동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1937년 카자흐 공화국으로 강제 이주한 뒤에는 종자와 종업기술 개선, 물 대는 방법, 광물비료 사용 등으로 수확량을 늘려 농업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 이 공로로 1947년 국가상을 받았으며, 1948년에는 '사회주의 노력영웅'으로 불려졌다.
정의
소련에서 카자흐공화국으로 강제이주를 당하여 아들 김홍빈과 함께 선봉 콜호즈를 세웠으며, 벼농사 확산 및 품종 개발에 기여한 {고려인 지도자}.
개설
생애
1937년에는 가족과 함께 카자흐 공화국의 크질오르다주(Kzyl-Orda州) 칠리 구역으로 강제이주되었다. 아들인 김홍빈과 함께 벼농사 재배 콜호즈인 선봉(Avant-Garde) 콜호즈를 세워서, 벼농사의 확산은 물론 현지 토양에 적합한 벼의 품종을 개발하는데힘썼다. 1940년에는 1㏊당 쌀 8t을 생산하였는데, 1942년과 1944년에는 1㏊당 각각 15t, 15.2t을 생산하여, 당시 일반적으로 1㏊당 3∼4t정도 생산하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기록적인 생산량을 달성하였다. 1958년에는 4년 전에 연해주로 돌아간 가족을 따라 크질오르다에서 우수리스크로 이주하였다. 1964년 8월 19일에 세상을 떠났다.
활동사항
김만삼은 벼 재배 실험을 통해서 종자와 종업기술 등을 개선하면서 수확량이 증진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데 힘썼다. 특히 적기에 일정하게 물을 대는 방법, 광물비료 사용과 제초작업 병행으로 수확량을 높이는 방법을 알아냈는데,이를 이용하면서 다른 콜호즈에도 전파하였으며, 특히 황무지에 관개용 수로를 건설하는데도 큰 기여를 하였다. 그 성과와 농업기술은 카자흐 공화국 정부의 인정을 받아, 소련 연방 레닌농학아카데미 카자흐 지부 회의, 국민경제달성 박람회 등에서 소개되기도 하였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 『중앙아시아의 코리안 에트노스─어제와 오늘』(심헌용·한 발레리, 이매진, 2013)
- 「카작스탄 고려인 영상물에서 나타난 고려인 주요인사 및 민족문화 관련기관의 활동」(김상철,『정신문화연구』99, 한국학중앙연구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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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корейцы казахстана в науке технике и культуре(Корейское научно-техническое общество кахак,Алматы, 2002)
- История и культура корейцев Казахстана(Ким, Г.Н.·Мен Д.В., Алматы: Гылым, 1995)
- Казахская ССР Т. 2 (Р. Н. Нургалиев, Алма-Ата: Гл. ред. Казахской советской энциклопедии,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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