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동안의 유배 생활과 가택 연금 생활을 당하면서도, 200여 편의 시, 단편, 수필 등을 한글로 써서 발표한 소련의 대표적인 고려인 시인이자 작가이다.
1908년 8월 26일에 함경북도 이원군에서 출생하였고, 1927년에 소련의 연해주로 이주하였다. 청년시절에는 연해주의 하바롭스크(Khabarovsk) 등지에서 작가 조명희(趙明熙, 1894∼1938)와 가까이 지내면서 문학적인 감화를 받았다. 하지만 조명희가 소련 당국에 의해 강제로 구금되자, 일본간첩 혐의로 소련 내무부에 체포되어 10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그 뒤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의 조선사범대학 문학부 재학하다가 1937년에 중앙아시아 카자흐공화국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1933년에 시「나의 가르노」를 러시아 한인 신문인『선봉(先鋒)』에 발표한 이래, 한글로 쓴 200여 편의 시, 단편, 수필 등을 발표하였다. 1938년에는 크질오르다(Kzyl-Orda) 조선사범대학 벽보 신문에 시「밭 갈던 아씨에게」를 게재하였다. 하지만 이 작품에 떠나온 원동(遠東)에 대한 그리움을담았다고 하여, 이 때부터 1959년까지20여 년 동안 소련 북극 지역의 아르한겔스크(Arkhangel’sk) 수용소에 가두어졌고, 그 뒤에도 소련 서부 지역의 우드무르트(Udmurt)에서 가택 연금되었다. 다만 1957년에 우드무르트 시당국의 검열을 거쳐 카자흐공화국(Kazakh共和國)에서 발행되었던 고려인 한글 신문인『레닌기치』문예란에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오랜 수용소 생활과 가택 연금 생활로 인해 대체로 공산당을 찬양하는 정치색이 강한 시를 쓰면서 석방을 희망하였다.
1959년에 석방되어 크질오르다로 돌아온 뒤에는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을 펴나갔다. 특히 시르다리야(Syr Darya)강을 바라보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서정시「씨르-다리야」를 발표하였는데, 이 시를 통해 정치색보다는 서정성을 드러내는 시풍을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 창작 활동을 함께 하였던 다른 시인들처럼 레닌의 업적, 10월혁명, 소련 공산당의 건설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풍요를 찬양하는 창작 활동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1981년에 러시아어판 시집인『도중에서』를 발간하였으며, 2001년 1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