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은 중앙아시아 및 러시아 등지에서 고려인들이 사용하는 언어이다. 고려인은 1863년 이후 함북에서 연해주로 이주를 시작하였다. 1937년 러시아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중앙아시아로 터전을 옮겼다. 현재는 소수 노년층이 함경도 방언에 기층을 두고 구사하는 한국어를 고려말이라고 한다. 고려말은 한국어 방언의 일종으로 동북 방언과 가장 가깝다. 한국어와 교류가 적어 현재도 옛말을 꽤 보존하고 있다. 고려말은 러시아어의 지배적인 영향을 받아 왔으며, 현실적인 이유로 현재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고려말 보존과 육성을 위한 학문적인 접근과 연구가 필요하다.
1863년 이후 주로 러시아 접경의 함북인들이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로 이주하기 시작한 이래 20세기 초기에는 상당수의 한인들이 연해주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들은 1937년 러시아의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하여 중앙아시아로 옮겨와 살게 되었고, 대체로 소수의 노년층만이 함경도 방언에 기층을 둔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는데, 이를 고려말이라고 부른다.
한국어 방언의 일종으로, 가장 가까운 방언은 동북 방언이다. 이는 연해주에 거주하던 고려인 대부분이 함경도에서 이주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조선 말기부터 함경도 사람들이 연해주로 건너가 정착했기 때문에 원래 이 지역에서 거주하던 고려인 대부분이 동북 방언 화자였다. 특히나 19세기 이후 한국어의 문어와 구어가 급변한 데 비해 이들은 격절(隔絶)되어 주로 구어만 썼기에 현재도 옛말을 꽤 보존하고 있다.
제정러시아 말기부터 형성된 제정러시아 극동지역의 한인사회는 소련체제가 형성되면서 당시 한반도의 일제식민지라는 상황과 맞물리면서 이전에 비해 더욱 활성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인 1937년까지 이른바 당시 소련 극동지역에서 고려인들이 사용했던 민족 언어는 한반도의 동북방언 가운데 함경북도지역 하부 방언에 해당된다. 소련 극동지역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기 전까지 행정기관이나 교육기관에서 사용된 문어이며 일상생활에서 사용된 구어이기도 하다.
강제이주 이후 소련 극동지역에서 고려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과정에서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이동된 고려사범대학은 소련의 소비에트화 정책에 의해 폐쇄되거나 러시아어로 교육이 이루어지는 일반 학교로 변경되었다. 이후 60여 년 동안 러시아어로 교육을 받고, 러시아어를 일상생활 언어로 사용해 왔기 때문에 소련시기 중앙아시아 사람들은 고려말을 후세들에게 계승시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고려인의 신문인 『레닌기치』나 고려말로 공연을 했던 고려극장이 중앙아시아에서 강제이주 이후 재건되어 민족어의 사용과 보급에 앞장섰지만, 소비에트화에 직면해 있는 강제이주 2세들에게 이는 현실적으로 수용 가능한 대안이 아니었다. 이들 세대들은 학교에서 기본적인 문법을 배울 수 있었고, 가정에서 조부모나 부모와의 대화를 통해 구어체를 익힐 수 있었는데, 이는 고려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했던 콜호즈나 소프호즈에서 운영되던 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에게만 해당되는 상황이었다.
고려말은 고려인들이 소련 시절, 빠르게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쓰기 시작하게 되면서 급속하게 사멸되고 있는 한국어 방언으로, 고려인 3세대 정도만 되어도 중앙아시아 한국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며, 아예 몇몇 단어만 아는 경우도 흔하다.
한국과 중앙아시아의 교류가 늘어나면서 한국어를 배워서 한국어는 알지만 중앙아시아 한국어는 아예 모르는 고려인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 일하며 한국어를 배운 고려인들과 중앙아시아 한국어를 구사하는 고려인들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러시아어로 대화하기도 한다.
어휘적으로는 러시아어 차용어가 매우 많다는 특징을 가지는데, 한국어로 단어를 새로 만들기보다는 러시아어를 그대로 차용해온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소비에트 연방 구성 15개국이 일종의 민족 국가 형태였고, 그나마 이렇게 국가 형태를 이룬 민족들의 언어는 어느 정도 발전했지만, 나머지는 주류언어인 러시아어의 지배적인 영향 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 『레닌기치』 지면에서는 소비에트 중앙아시아 고려사람들은 자신들이 사용했던 민족어를 ‘고려말’ 또는 ‘고려어’라 불렀고,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의 지원으로 북한체제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설립되면서 『레닌기치』 지면에 ‘고려’라는 용어대신 ‘조선’이 등장하면서 ‘고려’라는 용어는 ‘조선’으로 대체되어 사용되었는데, 이러한 추세는 소련 해체 전후까지 계속되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소련의 고려사람들은 그간 남조선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던 한국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당시 자신들이 사용하던 이른바 민족 언어 명칭인 조선말이, 한국말과도 상반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차별화될 수 있는 새로운 용어로 바꿔야할 필요성을 인지하게 되었다. 이후 이들은 소련해체를 전후하여 자신들이 다른 지역의 동포들과 구별하기 위해 ‘조선’ 이라는 용어 대신 이주 초기에 사용했던 ‘고려’라는 용어를 다시 사용하게 되었고, ‘고려사람’, ‘고려말’이라는 용어도 부활하게 되었다.
강제이주 이후 이미 3세대로 이어지고 있는 고려말은 이 기간 동안 구어로만 보존되어 왔고, 러시아어의 영향으로 적지 않은 변화를 겪어왔다. 1991년 소련해체 이후 한국과의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고려말’은 현대 한국어로 동화되는 양상이 일부 나타나고 있다.
고려말은 음운적인 측면에서 현대 표준한국어와 비교되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중세한국어에서 순경음 ‘ㅸ’을 가졌던 흔적들이 현대한국어에서 ‘ㅇ’으로 바뀌었지만, 고려말에서는 [b]이나 [v]로 나타나고 있다. 이주 1세대들은 예외 없이 [b]로 발음하지만,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배운 제2세대 이후 고려사람들은 [v]로 발음하는 것이 보편적인데, 러시아어의 간섭으로 생긴 대표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고븐 – 고운, 더바 – 더워서, 새비 – 새우, 어려바서 – 어려워서, 치바서 - 추워서
중세한국어에서 ‘ㅿ’은 현대한국어에서 ‘ㅇ’으로 변화했지만, 고려말에서는 ‘ㅅ’으로 나타나고 있다.
가슬 – 가을, 나슨 – 나은, 부서라 – 부어라
중세한국어의 ‘ㆁ’이 고려말에 남아 있다.
잉게/영게 – 여기, 정게 – 저기, 겅게 – 거기
한 단어내에서 모음과 자음이 결합할 때 현대 한국어에서는 ‘ㄹ’로 나타나는데, 고려말에서는 ‘ㄹㄱ’으로 실현된다.
갈가놓다 – 갈라놓다, 갈기 – 가루, 술기 – 수레, 실기 – 시루, 지달기다 – 기다리다
현대 한국어에서 받침으로 쓰인 비음 ‘ㄴ’이나 ‘ㅇ’은 고려말에서 탈락된다. 탈락된 앞 모음이 장음화되며, 모음 ‘ㅣ’가 첨가된다.
누:이 – 눈(目), 도:이 – 돈, 보:이 – 본(本貫), 선새:이 – 선생
현대한국어의 ‘ㅏ’ 나 ‘ㅓ’는 고려말에서 모음 ‘ㅐ’, ‘ㅔ’로 변화한다.
떽이 – 떡, 멕이다 – 먹이다, 애기 – 아기, 에미 – 어미, 핵교 – 학교
명사의 받침으로 쓰인 복자음의 발음이 현대한국어에서는 대부분 단순화되었으나 고려말에서는 구성하고 있는 복자음의 발음이 그대로 실현된다.
갑시 – 값, 달기고기 – 닭고기, 삭시 – 삯, 흘기 - 흙
어휘와 관련되어 고려말은 함경북도 지역방언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러시아어에서 차용된 단어들도 실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외국어 단어를 변형시킨 낱말들도 적지 않다.
‘따깐’은 “잔”을 뜻하는 러시아어 ‘스따깐(stakan)’에서 변형되었고, ‘마우자’는 “러시아인”을 지칭하는 말로, “털이 많은 사람”이란 뜻의 한자어 ‘모자(毛子)’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비지깨’는 “성냥”을 의미하는 러시아어 ‘스삐치끼(spichiki)’에서 변형된 말이다.
‘자고배’는 “타민족 간 결혼에 의해 태어난 혼혈아”를 지칭하며 한자어 ‘잡교배(雜交配)’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문법에 있어서는 현대한국어와 다음의 측면에서 차이가 나타난다.
현대한국어에서 자음으로 끝난 대부분의 명사에 ‘이’가 붙어 고려말에서 명사가 된다.
찻물이 한 따깐 마이겠니? (차 한잔 마실래?)
떽이 먹겠음둥? (빵을 드시겠습니까?)
이 공사 베고자 값이 눅소. (이 상점의 만두 값이 저렴합니다.)
주격조사는 ‘이’만 사용되고, 현대한국어에서 사용되는 ‘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주격조사 ‘이’의 높임형 ‘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려말에서 ‘당시이’는 현대한국어에서 3인칭 존칭으로 사용하는 ‘당신’과는 달리 2인칭 존칭으로 사용된다. 특히 장년층 이상에서 사용되며 화자보다 나이가 많거나 처음 만나는 사람에 사용한다. 러시아어의 2인칭 존칭인 [vi:]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대격에서 주격처럼 ‘이’로 쓰인 경우가 있고, 현대한국어의 ‘을’이나 ‘를’ 대신에 ‘으’나 ‘르’가 사용된다.
시락장물이 먹겠니? (시래기 된장국을 먹을래?)
달기 먹어리르 존니? (닭 먹이를 주었니?)
공동격에 ‘가’가 쓰인다.
아바:이 내가 가치 가깁소. (할아버지 저와 함께 가십시다.)
상대방에게 화자 자신을 낮추는 ‘저’라는 어휘가 존재하지 않는다. ‘제’라는 말이 사용되나, 이는 “자기” 또는 “자신”을 뜻한다. 러시아어의 “자기” 또는 “자신”을 의미하는 ‘쌈[ssam]’의 용법이 그대로 영향을 준 경우이다.
제 가지 않고 (자기가 가지 않고), 제비로 (자기가 지불하여)
부정문에는 ‘안’ 부정과 ‘못’ 부정이 사용되며, 짧은 부정문과 긴 부정문이 모두 쓰인다.
그렇게는 아이 되오. (그렇게는 안 되오.)
그렇게는 모 하오. (그렇게는 못 하오.)
내 인제 곰방 먹었다. 아이 먹겠다. (나는 이제 금방 먹었다. 안 먹겠다.)
맏아바이 주지 아이 합데. (큰아버지가 주지 않더군.)
안즉 아이 먹었다. (아직 안 먹었다.)
지시대명사에는 ‘잉게/영게 – 여기, 정게 – 저기, 겅게 – 거기’의 세 가지가 사용된다.
의문사는 ‘누기 – 누구, 무스게 – 무엇, 아무게 – 아무것, 아무께 – 아무깨, 어드메 – 어디, 어째 – 왜, 얼매 – 얼마, 언제 – 언제, 어느 – 어떤, 멧 – 몇’이 있다.
의문형에 쓰인 ‘오다’에 대한 바른 대답인 ‘가다’ 대신 ‘오다’가 쓰인다. 러시아어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니 시장 오겠니? (너 지금 오겠니?)”에 대한 긍정 대답은 다음과 같다.
야, 시장 오겠으꾸마. (예 지금 가겠습니다.)
고려말의 변천과정은 현재 중앙아시아 및 러시아의 고려인들이 겪어온 사회문화적인 과정이 그대로 반영된 언어변천의 사례라 할 수 있다. 고려말에는 19세기 말~20세기 초 한국어 구어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기도 하며, 또한 고려인들의 급격한 언어적인 러시아화의 영향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한국이 중앙아시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이전의 시기에는 1960년대 이후 일제 징용 한인들의 후손인 사할린 한인들이 중앙아시아 및 러시아 본토의 각지로 이주하여 급격한 언어의 러시아화 속에서 언어적인 특성을 보존하는 데 많은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소련 붕괴 이후 한국의 중앙아시아 진출이 활성화되면서 현대 표준한국어의 요소가 반영되는 양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현실적인 이유로 고려말에 대한 수요와 활용도는 급격하게 감소하여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으며, 젊은 고려인 세대들이 고려말 대신 현대 표준한국어를 습득함으로 인해 고려인 사회에서조차도 일부 단어를 제외하고는 쉽게 접하기 어려운 학문적인 연구대상 언어로 의미가 변화되고 있다.
해외한민족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한민족의 전통 언어자산이라는 측면에서 고려말 보존과 육성을 위한 학문적인 접근과 연구, 보존을 위한 체계적인 지원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