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운동 이전 이동휘(李東輝)가 파리에 대표를 파견하고자 할 때 모금위원으로 활약하였고, 3월 13일에 용정(龍井)의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이어서 대한국민회와 그 외곽단체인 간도청년회에 참여했으며, 철혈광복단에서도 활동하였다.
1920년 1월 윤준희(尹俊熙) · 한상호(韓相浩) · 임국정(林國楨) · 박웅세(朴雄世) · 김준(金俊) 등과 함께 일제의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같은 은행 용정출장소에 보내는 자금을 탈취하기로 결의하고 회령지점원인 전홍섭(全洪燮)을 포섭하여 송금 일자와 노선을 파악하였다.
1920년 1월 4일 윤준희 · 김준 · 박웅세가 같은 조가 되고, 최봉설은 한상호 · 임국정과 한 조가 되어 무기를 휴대하고 용정에서 약 10리 떨어진 동량(東良) 입구에 매복하였다. 마침 현금 수송 대열을 만난 윤준희 조는 권총 10여 발을 발사하여 일본 경찰을 사살하고 현금 5원권 10만 원과 10원권 5만 원 등 모두 15만 원을 탈취하였다.
최봉설은 이 돈을 가지고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도착하여 독립전쟁을 위한 계획 수립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윤준희 · 임국정 · 한상호 등은 1월 31일에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1921년 8월에 사형당하였다. 최봉설은 부상을 입은 채로 탈출하여 최계립이라는 이름으로 러시아에서 혁명활동을 벌였다.
이만(Iman)에 있는 대한의용군사회(大韓義勇軍事會)의 사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소대장 및 중대장으로서 백군과의 전투에서 공로를 세웠고, 특히 1922년 2월에 시작된 볼로차예프전투에서 임표(任彪)와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1923년 1월 해삼위(海參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적기단(赤旗團) 조직에 참여하여 단장에 선임되었다. 1923년 2월 적기단 본부를 만주로 옮길 때 만주 영안현 영고탑에서 적기단 서만(西滿) 사령부장을 역임하였다. 1925년에 적기단이 해체되자 러시아로 돌아가 연해주 소추풍 지역에 있는 그라데고보에서 안드레이예브카 콜호스 회장으로 일하였다.
그러다가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정책으로 1937년 중앙아시아 우즈베크공화국의 호레즌 갈대밭으로 이주 당하였다. 그 후 그리스챤 지역의 콜호스 회장,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 콜호스 부회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우즈베크의 침켄트시에서 1973년에 사망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