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회령 출신. 1919년 3 · 1운동이 발발하자 조국독립운동에 참가할 것을 결심, 만주로 건너가 이상설(李相卨)이 경영하는 서전서숙(瑞甸書塾)에 입학하였다.
그 뒤 용정(龍井)의 영신학교(永新學校)에서 교원으로 봉직하다가 한상호(韓相浩) · 임국정(林國楨) 등과 항일단체인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을 조직,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입단해 특파대장으로 한상호 · 임국정 · 최이붕(崔以鵬) 등과 더불어 간도 와룡동(臥龍洞) 김하석(金河錫)의 집에서 방책을 상의하였다.
그 때 김하석의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이 은행 용정출장소로 수시로 현금이 송금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탈취해 군자금으로 충당키로 하였다.
그리하여 정확한 송금 일시를 탐지하기 위해 조선은행 회령지점의 행원인 전홍섭(全弘燮)을 동지로 포섭하는 공작을 진행시키는 한편, 박웅세(朴雄世)와 김준(金俊)을 새로운 동지로 포섭하였다.
1920년 1월 4일 전홍섭에게서 현금 수송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동지들과 길에 매복했다가 무장경찰 3명의 호송을 받으며 두 필의 말잔등에 현금을 싣고 오자, 박웅세 · 김준과 같이 권총 10여 발을 연달아 쏘아 호송경찰 2명을 사살하고 현금 탈취에 성공하였다.
15만원의 거금을 탈취한 뒤 동료 최이붕과 같이 1월 5일 의란구(依蘭溝)에서 김하석과 만났다. 9일에 임국정이 도착하자 10일에 현금을 가지고 해삼위(海蔘威: 지금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으로 들어가서 체코슬로바키아제 무기를 다량 구입해 북로군정서에 제공해 청산리전투를 대첩으로 이끌게 하였다.
그러나 12월 일본경찰의 밀정 엄인섭(嚴仁燮)의 밀고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본헌병에게 임국정 · 한상호 등과 같이 잡혀 1921년 4월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으며,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