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동학교 ()

단체
1907년 만주 연길현 와룡동에 설립된 민족 교육기관.
이칭
이칭
창동소학교, 창동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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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07년 만주 연길현 와룡동에 설립된 민족 교육기관.
개설

창동(昌東)의 의미는 동국(東國)의 창성(昌盛)을 가리키는 것이다. 창동학교는 연길에서는 최초로 설립된 한민족 학교이다.

설립목적

기독교인 남공선(南公善), 마진(馬晉), 오상근(吳祥根), 이병휘(李炳徽), 남성우(南性祐) 등 애국지사들은 마을 유지들과 함께 돈을 마련하여 1907년 창동소학교를 설립하였다. 학교 교육의 취지는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었으며, 이 일대의 한민족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연원 및 변천

1910년에 중학과를 신설하여 소학교와 나누어 교육을 실시하고, 창동학원(昌東學院)으로 개칭하였다. 중학생은 모두 80여 명 정도였으며, 그 가운데는 북간도에서 뿐만 아니라 남북만 혹은 연해주에서 오는 학생도 있었다. 이 학교의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에 들어갔으며, 그 경비는 학교후원회에서 부담하였다.

1920년에 들어와 만주 각지에서 무장 항일 독립운동이 전개되면서 창동학교는 무장 투쟁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군사 훈련과를 특설하기도 하였다. 교장 마진은 명동학교와 창동학교의 교사와 학생으로 구성된 무장항일투쟁결사대인 충렬대(忠烈隊)를 조직하였다.

1925년까지 창동학원 중학부 졸업생만도 200여 명이 훨씬 넘었다. 그 가운데 상당수가 졸업 후 왕청현 나자구(汪淸縣 羅子溝)의 대전학교(大甸學校)로 들어가 전문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뒤 독립군 간부로 성장하였다.

몇 가지 사례를 들면, 1910년 3월 13일 용정(龍井)의 서전대야(瑞甸大野)에서 열린 ‘조선독립축하회’와 뒤이은 항일시위에서 창동학교 전 교사와 학생은 물론 와룡동 주민 대부분이 참가하여 항쟁하였다. 그 후 4월 25일에는 와룡동에서 ‘대한국민회’를 조직, 북간도 전역의 한인의 민정과 군정을 아울러 수행하는 군정부로 발전시키며 대한국민군(大韓國民軍)을 편성하였다.

1935년 일제의 군대가 들어와 학교를 점령하고 군대를 주둔시키려고 하자 이를 반대한 주민들이 스스로 학교를 불태워 버리고 자진 폐교시켰다. 그 후 1935년 9월 주민들은 창동학교의 교사들과 졸업생들에 대한 추모와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는 ‘사은기념비(師恩記念碑)’를 세웠는데, 현재 와룡동 사은비에 창동학교 설립과 운영과정에 공적이 큰, 원장인 오상근, 이병휘, 남성우 등의 이름이 있다.

기능과 역할

교장에는 마진(馬晉), 남인상(南仁祥), 교사에는 오상근(吳祥根)·신홍남(辛鴻南)·김종만(金鍾萬)·최종국(崔鍾國)·현우석(玄優碩)·오맹준(吳孟俊)이 재임하였고, 교과목은 성경·수신·국어·한문·작문·내외역사·내외지리·지문(地文)·외국어·산술·대수·기하·삼각·부기·주산·도화·생리·식물·동물·광물·물리·화학·심리·법제·경제·실업·창가·체조 등으로 구성되었다.

참고문헌

『국경지방시찰부명서(國境地方視察復命書)』(조선총독부, 1915)
『간도역사의 연구』(윤병석, 국학자료원, 2006)
『한국독립운동의 해외사적 탐방기』(윤병석, 지식산업사, 1994)
『한국유이민사』(현규환, 어문각,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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