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집(李仲執)은 1880년 5월 28일 함경남도 덕원(德原)에서 태어나 만주와 노령 지역의 독립운동가로 활약하였다.
1912년 북간도 지린성〔吉林省〕 옌지현〔延吉縣〕 국자가(局子街)로 망명하였다. 같은 해 2월 한인사회를 효과적으로 규합하고 항일 민족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설립된 북간도 한인들의 자치기구인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를 간민회(墾民會)로 변경하고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간민회는 1913년 1월 중국 지방정부로부터 설립 인가를 받았다
1912년부터 1919년경까지 간도 소영자(小營子) 소학교 교사, 광성학교(光成學校) 교사, 기독교 선교사, 중국 권학소(勸學所) 교사로 지내면서 한인 학도들의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12월 하순부터 1919년 1월경까지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국자가에서 열린 비밀집회에 참석하였다. 이때 러시아 지역 한족회(韓族會)의 요청에 따라 한족 독립선언서의 제작과 그 선언서의 공식 발표 문제를 사전에 논의하기 위한 회의에서 김약연(金躍淵)‧ 정재면(鄭載冕)‧정기영 등과 함께 간도 대표자로 선정되었다.
1919년 2월 옌지현 국자가를 떠나 3월 말경 러시아령 연해주 니콜스크(지금의 우수리스크)에 도착하였다. 이어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문제와 기타 한국의 독립운동에 관하여 논의하고 이곳에 머물렀다.
1920년 4월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 참변으로 인하여 연해주에서의 한인 민족운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런 가운데 같은 해 6월 연해주 추풍(秋豊) 당어재골 신길동(新吉洞)에서 최문서(崔文瑞)‧최찬식(崔燦植)‧황원호(黃元浩)‧이근선(李根善) 등 14명이 모여 한인 무장부대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여, 같은 해 8월 13개 지방 대표 26명이 참여한 가운데 ‘솔밭관 한족공산당’이 조직되었다.
1920년 한족공산당의 위원장으로서 김경권(金京權, 부위원장), 유해사(柳海史: 유진구, 선전부장), 장화삼(蔣化三, 노동부장), 장학년(張學年, 경무부장)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21년에는 행정부장, 1922년에는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아울러 한족공산당의 군정회의(軍政會議)에서 당 임원에 선출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 후 연해주 추풍 지역의 한인 무장부대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9월경 고려혁명군 연해주 총지부 총재로 활약하였다. 당시 총사령관은 김규식(金圭植)이었다. 1922년 말 일본군이 연해주에서 철수한 후 러시아 당국은 연해주에 있는 한인 무장부대의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이에 옛 부하들을 이끌고 라즈돌역 부근 우두고우촌에 ‘사회생활’이라는 집단 농장을 설립하여 거주하다가 스탈린에 의하여 숙청되었다.
199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