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덕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만주에서 신민부에 가입하였고, 한족총연합회, 한족자치연합회 등을 조직해 김좌진을 보좌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2년(고종 39)
사망 연도
1931년
출생지
평안북도 선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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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때, 만주에서 신민부에 가입하였고, 한족총연합회, 한족자치연합회 등을 조직해 김좌진을 보좌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생애 및 활동사항

평안북도 선천 출신. 1925년 만주 길림성 목릉현(吉林省穆棱縣)에서 북만주항일운동단체와 독립군의 통합단체로 조직된 신민부(新民府)에 가입하여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인 김좌진(金佐鎭)을 보좌하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12월 신민부와 참의부(參議府)가 중심이 되어 민족유일당을 추진하려던 혁신의회(革新議會)가 1929년 5월 해체되자[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참의부(參議府)의 통합운동과정에서 3부는 혁신의회와 국민부(國民府)로 재편되고 혁신의회는 1년간만 존속시키기로 하였다. 김좌진과 같이 북만주로 돌아가 1929년 7월 신민부의 후신격으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조직하여 본부를 영안현 산시역(寧安縣山市驛)에 두고 이 회의 주석인 김좌진을 측근에서 적극적으로 보좌하며 항일운동에 진력하였다.

1930년 1월 26일 김좌진이 공산주의자인 박상실(朴相實)의 저격을 받고 순국하자, 동요하는 단원들을 재결속시켜 한족자치연합회(韓族自治聯合會)로 재편하였다. 그해 10월 스토우[石頭河子]에서 하얼빈주재 일본총영사관소속 경찰의 습격을 받고 체포되어 4년 6월의 징역형을 받고 길림에서 복역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의 발발로 어수선해진 틈을 이용, 탈옥하다가 일본경찰에 피살되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유공자공적조서』(보훈처, 1984)
『독립운동사자료집』1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한국독립운동사』5(국사편찬위원회, 1969)
집필자
신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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