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선천 출신. 1925년 만주 길림성 목릉현(吉林省穆棱縣)에서 북만주항일운동단체와 독립군의 통합단체로 조직된 신민부(新民府)에 가입하여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인 김좌진(金佐鎭)을 보좌하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12월 신민부와 참의부(參議府)가 중심이 되어 민족유일당을 추진하려던 혁신의회(革新議會)가 1929년 5월 해체되자[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참의부(參議府)의 통합운동과정에서 3부는 혁신의회와 국민부(國民府)로 재편되고 혁신의회는 1년간만 존속시키기로 하였다. 김좌진과 같이 북만주로 돌아가 1929년 7월 신민부의 후신격으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조직하여 본부를 영안현 산시역(寧安縣山市驛)에 두고 이 회의 주석인 김좌진을 측근에서 적극적으로 보좌하며 항일운동에 진력하였다.
1930년 1월 26일 김좌진이 공산주의자인 박상실(朴相實)의 저격을 받고 순국하자, 동요하는 단원들을 재결속시켜 한족자치연합회(韓族自治聯合會)로 재편하였다. 그해 10월 스토우[石頭河子]에서 하얼빈주재 일본총영사관소속 경찰의 습격을 받고 체포되어 4년 6월의 징역형을 받고 길림에서 복역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의 발발로 어수선해진 틈을 이용, 탈옥하다가 일본경찰에 피살되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