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 초 유인석(柳麟錫) 등 10여 명이 만주 집안현(集安縣)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조직하였다.
이들은 강령과 항일투쟁방침을 제시하면서 계속 국내로부터 강을 건너 유입해오는 의병과 청년들을 모아 보약사 자체의 투쟁전열을 정비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이후의 의병전쟁은 일제의 무력탄압으로 인해 활발하지 못하여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이에 방향전환의 불가피성을 느낀 유인석이 연합작전을 위해 백삼규(白三圭)·조병준(趙秉準)·전덕원(全德元) 등이 환인현(桓仁縣)에서 조직한 농무계(農務契)·향약계(鄕約契), 홍범도(洪範圖)·차도선(車道善) 등이 장백현(長白縣)에서 조직한 포수단(砲手團) 등과 같이 통합해서 대대적인 무장항일투쟁을 의병식으로 전개하려다가 1915년 유인석이 죽음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 보약사는 위의 항일단체와 같이 1919년 3·1운동 이후 4월 각 단체대표 500명이 유하현(柳河縣)에 모여 대한독립단으로 흡수, 통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