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희산(希山). 일명 김탁(金鐸). 평안북도 의주 출신.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24세에 상경해 한성고등사범학교에 입학, 신학문을 탐구하였다.
1907년 정미조약 체결 때 서울 종로에서 반대연설을 하다가, 평리원(平理院) 구치감에서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10년 이후 만주로 건너가, 봉천강무당(奉天講武堂)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뒤에는 의병투쟁에 가담하였다. 1919년 각계각층의 대표 560여 명이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모여 대한독립단을 조직할 때 참여, 독립단총재부에서 활동하였다.
동시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평북독판부(平北督辦府) 국내특파원으로 선발되어 백의범(白義範) · 백기준(白基俊)과 함께 국내에 잠입, 평안도 · 황해도 일대에 연통제(聯通制)를 조직하고 88개소에 달하는 독립단 지단(支團)을 설치, 운영하였다. 대한독립단에서 갈라진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의 재무부장의 일을 맡아 무장 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1921년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사의 사장이 되어 민족정기를 앙양하며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22년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선전부장에 취임해 양국간의 친선을 도모하였고, 임시의정원의 평안도대표의원의 일을 맡아보았다.
1924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학무부차장이 되어 학무부총장의 직무까지 겸임하였다. 1927년 3월 윤세용(尹世茸)이 사임하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명의로 참의부참의장(參議府參議長)이 되어 참의부의 재건운동에 힘썼다. 1928년 중국 몽강현(濛江縣)에 무관학교를 설치하고 군인 2백명을 육성했으며, 참의부의 기관지 『정로(正路)』도 간행하였다.
그리고 길림(吉林)에서 정의부(正義府) · 신민부(新民府) · 참의부(參議府)의 삼부통일대표회의에 참의부대표로 참석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표 홍진(洪震) 등과 협의 끝에 한국독립당과 군민의회(軍民議會)를 조직하였다. 이 회의에서 김승학은 군민의회의 민사위원과 한국독립당의 최고간부직을 겸하게 되었다.
이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에 중일군경합동대(中日軍警合同隊)에게 붙잡혀 신의주 · 평양 등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중국에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7년에는 백범 김구의 명령을 받아 천진(天津)에 비밀리 파견된 안경근(安敬根), 조상연(趙相淵)의 연락책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광복 후에 귀국하여 정당 활동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한국독립사(韓國獨立史)』 등이 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