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일제강점기 때, 임시정부에 가담해 경무국장 김구를 보좌하면서 독립군 모집 및 밀정 숙청 작업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922년 2월에는 혁명 러시아의 과도기적 혼란으로 독립운동이 어렵게 되자 상해로 이동하였다. 여기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담해 경무국장 김구(金九)를 보좌하면서 일제 관헌과 밀정 숙청에 진력하였다.
1923년에는 동지들의 권유로 쓰촨군관학교[四川軍官學校]에 입학하여 이준식(李俊植)·문일민(文一民) 등과 같이 졸업하였다. 1925년 윈난사관학교[雲南士官學校] 졸업 후에도 임시정부 요인들과 국권회복 문제를 협의하였다.
동삼성으로 건너가 정의부(正義府) 군사부의 위원이 되어 사령장 김창환(金昌煥)의 참모로 활약하였다. 1929년에는 정의부·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 등 3부 통합운동에 민족통합적 차원에서 합작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실패하자 다시 상해로 갔다.
1930년 상해로 돌아온 뒤 김구·이동녕(李東寧)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과 협의해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의 구대장(區隊長)으로 활약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의 투탄 의거에 힘입어 중국 국민당정부의 한국독립군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로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분교가 개교하였다. 여기서 안경근은 직접 학생들을 훈련했으며, 난징[南京] 등지에서 군관생도 모집에도 주력하였다.
1934년에는 장개석(蔣介石) 총통과 김구와의 연락 책임을 맡아 한·중간의 친선을 도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상해 프랑스 조계(租界)를 중심으로 한 시가 일원에 일제 밀정들의 발호가 극심하자 김구·정화암(鄭華巖) 등과 함께 밀정 소탕에 공을 세웠다.
1940년대 충칭[重慶] 시절에는 김구 주석을 보좌하고 임시의정원 의원직을 겸하면서 조국광복에 진력하였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 『대한민국임시정부사』(이현희, 집문당, 1982)
- 『독립운동사』 4·7·1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1979)
- 『독립운동사자료집』 10(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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