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金澈, 1886~1934)은 전라남도 함평군 출신으로, 본관은 영산(永山), 자는 성필(成弼), 호는 일강(一江)이다. 어릴 때 이름은 김영탁(金永鐸), 이명은 김중청(金重淸)이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운 후 영광에 있는 광흥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09년에 법관양성소에 입학하여 다니다가 일본으로 유학하여 메이지대학〔明治大學〕을 졸업하고 1915년에 귀국하였다. 1917년에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1918년 신한청년당 창립에 참여하였다. 잠시 고향으로 돌아와 재산을 처분하고 상하이로 돌아갔다. 1920년 7월에 열린 궐석재판(闕席裁判)에서 신한청년당 대표로 국내에 파견되어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는 이유로 5년형을 선고받았다.
1919년 3월부터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준비에 가담하였다. 그해 4월 10일 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어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제정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는 데 한 축을 담당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재무부 위원, 교통차장, 지방선전부 부총판 등을 역임하고, 1920년 5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 직할로 설립된 육군무관학교 교관에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 이외에 대한적십자회에서 활동하였고, 특히 상해대한교민단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1년 9월 상해대한교민단 본구(本區) 임원이 된 이래, 1932년 윤봉길 의거로 항저우〔杭州〕로 피신할 때까지 꾸준히 활동하였다. 1922년 3월부터 8월까지는 교민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23년 1월에 시작된 국민대표회의에 전라남도 대표로 참석하여 개조파의 입장에서 헌법기초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25년 박은식이 제2대 대통령으로 구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 내각에서 외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26년 김구 국무령 체제가 수립되면서 법무장으로 선임되었다. 1927년에는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 집행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29년 11월 김영탁(金永鐸)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고, 1933년부터 대한민국임시의정원에서 전라도의원 등 여러 직책을 거치며 지속적으로 활동하였고 국무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34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회의 비서장으로 선임되었으나, 급성폐렴에 걸려 6월에 숨을 거두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追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