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강릉(江陵). 호는 일주(一洲) 또는 금강산인(金剛山人). 의암 유인석(柳麟錫)의 제자이다.
1918년 2월 21일 『매일신보』에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에서 공부중이라고 그의 묵죽(墨竹)과 함께 그가 소개되어 있으나, 김규진(金圭鎭)이 개설했던 서화연구회(書畵硏究會)에서 그림 수업을 받고 이병직(李秉直)과 함께 그해 졸업하였다.
사군자 중에서도 특히 대나무를 잘 그렸다. 유작으로 조선 말기의 전통을 따라 1918년에 그린 「묵죽도」(개인 소장)와 「죽석도(竹石圖)」(간송미술관 소장) 등이 전한다.
1919년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강원도대표 의원을 지냈으며, 1921년 귀국하여 독립운동을 펼치다 붙잡혀 3년 징역형을 겪었다. 이 때 그의 묵죽은 일제에 대한 적개심으로 창칼같은 기개와 예리함을 지닌 특징을 보여주기 시작했으며, 스스로 감옥에서 그림을 자득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묵죽은 최고로 평가받았다.
1946년 대동한묵회(大東翰墨會)에 참여하기도 했다. 일제의 패망이 다가오자 여운형 등과 더불어건국동맹(建國同盟)을 결성하는 등 독립지사였으나 해방후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중 안타깝게 사망했다.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