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 全州), 호는 동원(東園)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술초(李述初), 할아버지는 이도본(李道本), 아버지는 이신응(李愼應)이다.
1859년 3월 6일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 1880년 증광시에 급제하여 승정원 가주서가 되어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1882년 6월 홍문관 교리가 되었고, 1886년 거창부사에 임명되었다. 1890년 11월 『선원보략』을 수정할 때 찬수감인 종부정으로 활약하여 가자되었고, 1891년 8월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1895년 5월 중추원의관으로서 진주부 관찰사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8월 공주부 관찰사가 되었다. 1896년 8월 비서원승이 되었고, 1898년 1월 종정원경에 임명되어 여흥대부인(대원군 부인)의 장례를 총괄하였다. 이후 태복사장, 내부 협판, 의정부 찬정, 회계원경, 홍문관 학사와 평식원 총재, 궁내부 특진관, 관제 이정 의정관, 내장사장, 중추원 찬의, 경상북도 관찰사, 제실회계 심사국장을 두루 역임하였다.
1907년 5월 이완용 내각의 학부대신이 되어 이완용 등과 더불어 고종황제 폐위를 모의하고 황제 양위와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체결 과정에서 적극 활동하여 ‘매국 대신’, ‘정미7적’ 등으로 지탄받았다. 같은 해 10월 18일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이는 고종 황제 퇴위, 한일신협약 체결, 군대 해산 등의 과정에서 대한제국 대신들이 일제에 협력하였던 일에 대한 포상의 성격을 갖고 있다. 같은 해 9월 7일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훈1등 팔괘장을 받았고, 10월 25일 태극대수장을 받았으며, 12월 27일에는 특별히 종1품으로 가자되었는데, 이 역시 한일신협약 체결을 전후로 한 시기에 그를 포함한 정미7적이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 행한 포상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재곤의 1907년 행적과 관련하여 조선총독부 비밀문서인 『조선귀족약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씨는 유학자를 가장하여 권모술수에 능한 책사로서 학식이 있었으며 고전에 정통하였다. 또한 달변가였고 이에 더해 왕실의 근친으로서 (생략) 이왕가의 중심인물이 되었지만 장기인 간계를 부려 안심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그가 1897년에 이태왕 전하에게 황제의 존호를 올려 황위에 오르자 국호를 고쳐 대한이라 칭하고 연호(건양)를 고쳐 광무라 칭하였다. 덕수궁의 정문 문호(대안)를 고쳐 대한이라 칭해야 한다며 무척 노력하여 전하의 환심을 사고 그 공로로서 요직을 놓지 않고 권력의 일세를 누렸다. (생략) 이렇게 하여 입각한 이재곤은 이완용 총리대신과 함께 이태왕 전하의 양위를 압박하고 이를 단행하여 일본으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여받고, 조선 훈1등 태극장에 올라 정1품으로 특훈을 받았다. 이것으로써 옛날에 말한 국호와 연호 개정을 주장한 왕가의 친척인 이재곤은 세상 사람들 모두 그 변심에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후 1907년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 황태자를 환영하기 위해 전·현직 대신 관리들이 조직한 신사회의 발기위원을 맡았고, 유림계를 회유하기 위해 조직된 대동학회의 특별총회에 참석하였고, 강설하여 대동학회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1908년 6월에는 박제순 등과 한자통일회를 발기하였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사살당하자 한자통일회 지회장으로서 추도회를 발기하고 개최하였다. 1909년 12월 일진회의 합병청원에 반대하며 이완용이 합병의 주도권을 갖고자 열었던 국민연설회에 참석하여 동조하였다.
일제 강점 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한일합병에 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10년 10월 7일 발표된 자작 작위 수여 대상자에 포함되었다. 그에 따라 1911년 1월 13일 일본 정부로부터 5만원의 은사공채를 받았고, 같은 해 2월 22일 총독관저에서 열린 작기 본서 봉수식에 참석하였다. 또 1912년 8월 1일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고, 12월 종4위에 서위되었으며, 1915년 11월 다이쇼천황 즉위식에 참석하였고,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0년 10월 1일부터 1920년 5월 10일까지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인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을 지냈다. 1917년에는 불교단체인 불교옹호회의 고문이 되어 일제의 통치에 협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시기 작위반납을 신청하였으나 각하되었고, 1928년 11월 쇼와대례기념장을 받았으며, 1925년 12월과 1933년 12월 28일에 각각 정4위와 종3위에 승서되었다. 중일전쟁 직후에는 조선총독부 주최 시국간담회에 출석하였고, 1939년 11월 어용유림단체인 조선유도연합회의 고문에 추대되었다. 1943년 7월 11일 사망하여 자작 작위는 같은 해 11월 1일 손자 이해국이 세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