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본관은 함안(咸安). 본명은 조용원(趙鏞元). 호는 호일(胡逸). 경기도 양주 출신.
1920년 2월 일본경찰에 수배되자 상해로 망명하여, 상해남방대학부속중학교(上海南方大學附屬中學校)를 거쳐 상해남방대학역사사회학과(上海南方大學歷史社會學科)에서 수학하였다.
한편, 1927년 김무정(金武亭)·윤호(尹浩)·조한용(趙漢用)·허열추(許烈秋) 등과 더불어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을 조직하여 정치문화부장 겸 선전조직부장으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10월 중국본부한인청년총동맹(中國本部韓人靑年總同盟)을 결성하고 중앙위원장에 임명되어 중앙본부 및 각 지부간부를 총지휘하여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28년 한커우[漢口]에서 열린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東方被壓迫民族聯合會) 창립 총회에 참여하였다.
그 뒤 만주로 가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군총사령관 양세봉(梁世奉) 휘하에서 동만청년동맹(東滿靑年同盟)을 조직하여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하다가, 1929년 북경(北京)으로 건너 가 다물단(多勿團)에 가담하여 친일분자 숙청을 전개하였다.
1930년 상해에서 화랑청년회(花郎靑年會)를 조직하였으며, 그 해 겨울 월간 잡지 『한보(韓報)』 편집위원을 거쳐, 1931년『한국문원(韓國文苑)』을 발간하는 등 문화사업에 진력하였다.
1933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가입하여 특파원으로 시안[西安]에 파견되어 한중군사협력을 협의하였고, 1935년 조소앙(趙素昻)·홍진(洪震) 등과 같이 월간 잡지 『진광(震光)』을 발간하였다.
1938년 한국독립당 중앙상임위원으로 선임되고, 비서부장·조직부장·선전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그 해 10월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으로 피선되었다.
1940년 한국광복군 조직에 참여하여 총사령부 부관에 임명되었고, 1942년 총사령부 법무처장·정훈처장 등을 역임하며, 일본제국주의와의 투쟁을 전개하던 중 광복을 맞아 1946년 귀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