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포민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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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사건
1884년(고종 21) 초 전라도 가리포에서 일어난 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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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884년(고종 21) 초 전라도 가리포에서 일어난 민란.
내용

허사겸(許士兼)·문사순(文士巡)·최도일(崔道一)·최여집(崔汝集)·채운집(蔡云集) 등이 주동하였다. 19세기초 순조즉위 후 소수의 세도가문에 국가권력이 집중되고 국가의 기강이 무너져 삼정(三政)의 문란이 심화되어갔다.

이러한 국가기강 문란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는 농민들의 탐관오리에 대한 반발이 민란의 형태를 띠면서 전국적인 양상으로 확산되어갔다.

이때 가리포에서도 관아의 관리들이 백성들을 멋대로 경제적 침탈을 자행하였다. 부호들의 재산도 마음대로 빼앗아가자 백성들은 정장소원(呈狀訴寃)할 것을 목적으로 석장(石場)에 모여 성토한 뒤 관아를 점령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강진현감 정학순(鄭學淳)을 파견하여 소요의 원인과 경과를 조사하게 하였으나 공정하지 못하였다. 이어 장흥부사 송기로(宋綺老)를 핵사관(覈査官)으로 파견하여 조사하게 하였다.

그 결과 주모자 허사겸을 효수하여 민란의 확산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나머지 주동자 및 관련관리들을 모두 유배하였고, 강진현감과 장흥부사도 그 조사과정의 미흡함을 들어 책임을 물었다.

또한, 민란의 원인으로 가장 핵심이 되는 첨사 이상돈(李相惇)을 의금부에 압송하여 치죄하였다. 강제로 빼앗은 전곡(錢穀)을 모두 백성들에게 되돌려주었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일성록(日省錄)』
『비변사등록(備邊司膽錄)』
『고종조의 민란연구』(박광성, 인천교육대학논문집 14, 1980)
집필자
박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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