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밀양 출신. 대구 계성중학교를 졸업한 뒤 농업에 종사하다가, 1918년 11월 만주로 망명하여 길림(吉林)과 상해(上海)를 전전하면서 독립투쟁을 행동으로 옮기기로 결심하고, 1919년 11월 10일 김원봉(金元鳳)·이종암(李鍾巖)·이성우(李成宇)·윤소룡(尹小龍)·배중세(裵重世) 등 신흥무관학교 출신들과 함께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황상규(黃尙奎)를 중심으로 직접 행동대가 조직되자, 1920년 3월 상해에서 구입한 폭탄을 휴대하고 고향인 밀양으로 돌아와서 최경학(崔敬鶴)과 접촉, 거사계획을 세웠다.
1920년 12월 27일 최경학이 밀양경찰서에 폭탄 2개를 던져 건물을 크게 파괴시켰다. 그 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잡혀 3년형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 중 1년 6개월 만에 가출옥, 석방되었다.
그러던 중 1925년 7월 11일 이종암이 국내에 잠입하였고, 그 해 11월 이종암·배중세·한봉인(韓鳳仁) 등 여러 동지와 거사계획을 세우고 준비하던 중, 일본경찰에 탐지되어 이종암이 잡힘에 따라 경북의열단사건(慶北義烈團事件)에 연루되어 붙잡혔다.
대구지방법원에서 공판이 시작되고, 심한 경찰의 고문에 심하자 몇 번이나 자결을 기도하였으며, 끝내는 옥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