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애(朴愛)는 1896년에 태어났으며, 본적이나 출생지에 관한 정보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명은 박마다베이이며, 1927년 사망하였다.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 이후 하바롭스크에서 수립된 극동소비에트 집행부에서 비서장을 역임하였다. 1918년 5월 하바롭스크에서 김알렉산드라, 이동휘와 함께 한인사회당 결성에 창립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 근교에서 신민단과 한인사회당이 합동하여 한인사회당이 결성될 때 박진순(朴鎭淳)과 함께 코민테른 파견 대표단의 일원으로 선임되어 7월에 모스크바에 파견었다. 1919년 11월 옴스크 한인공산당 조직에 참여하여 현지 한인국민회와 협력하여 활동할 것을 주장하였다.
1920년 1월 22일 한인사회당의 당원으로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참석하였다. 4월에 귀환하였으며, 7월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전로한인공산당 제1회 대표원회의공산단체에 참석하였다. 회의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있는 한인 공산주의 단체의 통합을 목적으로 소집되었다. 1920년 10월에는 치타 극동공화국 원동부 내 한인부에서 활동하였다. 박애는 러시아공산당 극동공화국 내 한인 조직화에 관한 최고 책임자의 위치에 있었다.
상하이파였던 박애는 이르쿠츠크파와의 갈등으로 1921년 4월 극동공화국에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같은 해 6월 임시고려군사혁명법원에서 반혁명 혐의로 징역형을 받았으나, 1922년 4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조선문제결정서에 의하여 석방되었다.
1923년 상반기 상하이의 국민대표대회에 고려혁명군 적위장교단의 대표자로 참석하였고 그 후 러시아 연해주에서 소련공산당 연해주위원회 약소민족부장을 지냈다. 1924년 5월 고려공산당 창립준비대표회 준비위원회에서 통신부로 활동하였다. 1927년 4월 15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전소비에트대회에 제3국제공산당 극동위원회 고려부장으로 참석하여 러시아 영내 한인들의 자치 문제를 제의하였다. 1927년 일본 영사관의 밀정으로 지목되어 소련 비밀경찰에 의해서 체포, 총살되었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