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5월 하바로프스크에서 이동휘(李東輝)계의 이흥삼(李興三)·미하일김(金)·김진(金震)·조장원(趙璋元)·전일(全一)·이영호(李永浩)·박갑(朴甲) 등을 간부로 해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다.
1919년 8월 이동휘와 측근들이 상해(上海)로 이동해 갔다. 시베리아에서의 사회주의운동을 유지하기 위해, 1920년 2월 장도정 등이 이동휘의 양해하에 일세당(一世黨)을 한인사회당으로 확대 재조직하였다.
박모이세이 페트로비치·박이반 다닐로비치·전일·김진·이용억 등과 함께 당칙기초위원이 되어 한인사회당의 약법(約法)을 제작, 시베리아의 한인사회에 배포하였다.
또 회장에 선임되었으며 부회장 김미하일 미하일로비치, 의사회장 김진, 의사회 부회장 이흥삼, 선전부장 전일, 노동부장 조장원, 재정부장 이영호 등 간부진을 조직하였다.
특히,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 주둔부대에 사회주의를 선전하는 문건을 살포하는 한편, 규율을 문란하게 하는 신일본개조동맹(新日本改造同盟)의 명의로 된 경고문을 대량 살포하였다. 이 경고문 중에는 일본군의 시베리아철수 촉구와 일본의 공화주의혁명에 관한 선동도 포함되었다.
장도정은 극동공화국에 있어서의 러시아공산당의 최고기관인 다르뷰로[遠東部]에 부설된 한인부(韓人部)의 5두제(頭制)의 1인이기도 하였다. 5두(頭)는 박애(朴愛)·계봉우(桂奉瑀)·김진·장도정·박창은(朴昌殷)이었다.
한인부는 상해파 대 이르쿠츠크파와의 군권 투쟁에서 상해파에 속했기 때문에 자유시사변과도 깊은 관계가 있었다. 1921년 9월 간도계의 무장단체와 민족운동의 정치단체들이 발표한 「자유시사변에 대한 성토문」에 의하면, 장도정은 계봉우·김진·박애 등 30여 명과 이르쿠츠크집단을 지지하는 적군(赤軍)에 붙잡혀 옥고를 치른 것으로 보인다.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