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강(姜)나후렌치, 권성만(權成萬), 김용칠(金龍七), 김(金)와시리, 백인석(白仁錫), 술리모프로 불렸다. 본적은 함경북도 회령이다.
러시아의 연해주 포시에트 구역 쿠라베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1913년 러시아 국립 소학교에 입학해 1920년 봄에 졸업했다.
이후 1922년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국립 고등소학교를, 1924년 니콜리스크 · 우스리스크의 러시아 국립 제1중학교를 졸업하였다. 1922년 재학 중 러시아공산청년동맹(콤소몰)에 가입, 니콜리스크 · 우스리스크 제1중학교 야체이카에 배속되어 공산주의에 대한 교양과 훈련을 받았다.
1924년 가을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러시아 국립 원동대학(遠東大學) 공과(工科) 1학년에 입학했으나, 11월 학자금이 부족해 학교를 그만둔 후 야학 교사 등을 하면서 계속 면학의 길을 모색하였다.
1925년 1월 조선인의 공산주의운동을 통일할 목적으로 연해주에서 당과 공산청년동맹 내의 청년들로 비밀결사를 조직했는데, 그것이 종파로 간주되어 러시아공산청년동맹에서 제명되었다. 그후 간도로 건너가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에 가입,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7월 간도 용정(龍井)에서 안재규(安在奎)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에 가입, 천수일(千水一)을 책임자로 하는 제3야체이카에 배속되었다. 그 해 10월경 ‘제1차 간도공산당검거사건’이 일어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피신하였다.
1928년 3월 조선의 실정을 조사하기 위해 국내로 들어가던 중 용정에서 이종림(李宗林)과 회합, ‘조선공산당 3차 탄압’ 후의 당 조직정비에 대해 협의하였다. 이후 곧바로 고광수(高光洙)와 함께 경성으로 들어와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과 조직부장을 맡았다.
그 즈음 김재명(金在明) · 고광수(高光洙) · 박문병(朴文秉) · 이계심(李啓心) · 김복진(金復鎭) 등과 중앙위원회를 개최, 고려공산청년회의 하부기구에 대해 협의하고, 하부기구 정비와 고려공산청년회 건의안 등을 모스크바의 국제공산청년동맹에 보고하였다. 국제공산청년동맹 제5차 대회에 참가할 대표자로 선정되어 그 해 8월 모스크바로 갔다.
국제공산청년동맹 동양부에 위의 사실들을 보고하고 지부 승인을 요청했으나 거부되었다. 1928년 1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위 내용을 보고한 후 개별적으로 국내로 들어가 고려공산청년회의 ‘그룹’을 결성하기로 하고 각 지역을 분담했는데, 고광수로부터 함경도 지역을 인계받기로 하였다.
1929년 1월 길림(吉林)에서 고광수 · 박문병 · 최덕준(崔德俊) 등과 함께 고려공산청년회(ML파) 중앙위원회를 재결성하고 임시 선전부 부원이 되었다. 이후 모두 국내로 들어가 전국 각지에 지방 야체이카를 조직해서 성과를 거두면, 공산청년회대회를 개최하여 정식으로 중앙간부를 선정하기로 하였다.
1930년 1월 간도 두도구(頭道區)에서 이문홍(李文弘)과 회합, 함북북청에서의 고려공산청년회 붕괴 상황과 먼저 입국하여 활동하던 고광수 등의 검거 소식을 들었다. 이문홍과 협의 끝에, 노동자 · 농민에 기반하여 공산당과 공산청년회를 재건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그 해 5월 이문홍과 함께 국내로 들어와, 함북명천의 황운한(黃雲漢)과 황창한(黃昌漢), 함남이원의 이성원(李成園) · 주재찬(朱在瓚) · 조시균(趙時均) 등 라이콤 지도자들을 만나 공산당 재건을 위한 기초조직 결성에 협력할 것을 요청하였다.
6월에 함남 흥남에서 최영춘(崔英春) · 진형수(陳炯洙) · 이문홍과 협의, 조선공산당 함남도위원회(ML파)를 결성하고 책임비서를 맡았다. 1931년 2월 이종림, 고경흠(高景欽) 등이 당재건 준비조직으로 결성한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의 조직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 해 4월 이종림 · 권대형(權大衡) · 서인식(徐寅植) · 김기선(金琪善) · 고경흠 등과 협의, 대중에 기초하지 않고 파벌적 성격이 짙은 위 조직을 해산하고,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를 조직하기로 하고 그 조직 부분을 담당하였다. 또한 경성제국대학을 비롯, 서울 지역 각급 학교의 반전(反戰) · 반제운동을 조직하고 지도하였다.
특히 이종림이 지도하던 경성제국대학에서는 신현중(愼弦重) · 시천조언(市川朝彦) · 조규찬(曺圭瓚) 등을 비롯한 많은 학생들을 모을 수 있었다. 그 해 8월 신현중의 소개로 안복산(安福山) · 차계영(車啓榮) · 김학준(金學俊) 등을 만나 공산청년회를 조직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신현중을 중심으로 선전 · 선동용 반전격문을 인쇄 · 배포할 계획을 세우고, 먼저 약 4,800매를 제작, 조선극장 등 서울 시내 공공장소에 배포하였다. 11월 동대문경찰서에 검거, 1934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종결되어 공판에 회부되었다.
1935년 1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0년형을 언도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하던 중 이재유(李載裕) 등과 함께 옥내(獄內)공산주의자동맹을 조직하고 그 총책을 맡았다.
1943년 1월 만기출소할 예정이었으나, 이러한 옥내 활동으로 1941년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요죄로 징역 2년 6개월을 언도받아, 1945년 8·15 해방과 함께 출옥하였다. 해방 직후 옥내공산주의자동맹을 모태로 하여 즉시 출옥동지회를 조직,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 서울주재 소련영사관 샤브신과 연락, 소련공산당의 조선정보책임자를 맡았다. 1945년 9월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해 중앙위원 및 정치국원을 맡았다.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고 11월 전국인민위원회가 결성되자, 중앙인민위원회의 인민위원 및 외교부 대리로 선임되었다.
12월 모스크바3상회의가 결렬되자 1946년 1월 조선공산당 정치국원으로서 소련영사관의 샤브신과 회담하였다. 그 해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조선공산당측 대의원으로 출석해 중앙위원이 되었다.
이 무렵 개최된 ‘조선공산당 중앙 및 도당 대표동지 연석회의’에서 박헌영 그룹의 분파주의를 비판하였다. 7월에 조선공산당의 ‘신전술’이 발표되자, 이를 정치국이나 조직국의 회합 없이 박헌영 그룹 간부의 파벌모임인 부장회의에서 결정 · 지시된 전술이라고 비판하였다.
같은 해 8월 조선공산당측의 ‘3당합당’ 발표에 대항해 서중석(徐重錫) · 김철수(金錣洙) · 이정윤(李廷允) · 김근(金槿) · 문갑송(文甲松)과 함께 「합당 문제에 대하여 당내 동지 제군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청년해방일보』 8.5 호외)하고, 이주하(李周河) · 김삼룡(金三龍) · 이현상(李鉉相) 등 박헌영측 인물들을 비판하였다.
이로 인해 이른바 ‘반당(反黨)행위’를 했다고 해서 무기정권(無期停權) 처분을 받았다. ‘대회파 공산당’ 책임비서로서 대응하다 미군정청에 검거되기도 하였다.
그 해 10월 신민당 당수 백남운(白南雲)을 중심으로 한 사회노동당 준비위원회 발족에 참가하고, 백남운과 함께 38도선 이북을 방문하였다. 11월 사회노동당이 결성되자 부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1950년 7월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