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노동연맹회는 1922년 10월 조선노동공제회에서 이탈한 윤덕병(尹德炳)·백광흠(白光欽)·강달영(姜達永) 등에 의해 조직되었다. 조선노동공제회는 한국 노동운동의 초기 단체로, 노사 협조적 또는 개량주의적이라는 비판과 함께 지식인에 의한 계몽주의적 단체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 때문에 윤덕병 등 사회주의자들이 사회혁명주의를 표방하면서 조선노동공제회에서 이탈하여 사회주의 노동단체로서 이 단체를 결성하였다.
1922년 1월, 조선노동공제회의 윤덕병·김한(金翰)·신백우(申伯雨) 등 19명이 무산자동지회를 결성, 한국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 단체를 만들었다. 같은 해 10월 15일, 그들은 조선노동공제회를 독자적으로 해산할 것을 결의하고, 이어 16일에 경성인쇄직공친목회를 비롯한 노동단체대표들이 윤덕병 등과 함께 조선노동연맹회 결성준비회를 개최, 18일에 장사동동양염직회사 공우협회 사무실에서 창립 총회를 가졌다.
이 연맹회에는 경성전차종업원조합·경성인쇄직공친목회·경성양복직공조합·진주노동공제회·대구노동공제회·안동노동공제회·경성노우회·반도고무직공조합·감포노동공제회·경성이발조합·정읍노동공제회·청진노동공제회·경성양화직공조합 등 모두 13개 단체가 가입했고, 회원은 3만 명에 달하였다.
이 때 채택한 강령은 ① 우리는 사회 역사의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 신사회 건설을 도모함. ② 우리는 공동의 힘으로 생활을 개조하기 위하여 이에 관한 지식의 계발, 기술의 진보를 도모함, ③ 우리는 현사회의 계급적 의식에 의하여 일치 단결을 도모함 등이었다.
이 단체는 노동쟁의가 일어나면 그것을 지원하였고, 1923년 5월 1일에는 메이데이(May Day) 행사를 열어 세계 노동운동과 보조를 함께 하는 등 노동운동을 사회주의운동과 합류시켜 가려고 하였다.
1923년부터 사회주의운동이 서울청년회 계열(서울파)과 북성회 참여 유학생이 주축이 된 신사상연구회(화요회) 계열로 대립하게 되면서 조선노동연맹회 역시 그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 단체가 김약수(金若水)·송봉우(宋奉瑀)·김찬(金燦)·김재봉(金在鳳)·홍명희(洪命熹)·권오설(權五卨) 등의 화요파와 연결되어 있는 반면, 노동대회나 조선노동공제회의 잔류 세력은 서울파와 연결되어 있어 노동운동의 지방조직을 확장하는 데 여러 가지 소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파쟁은 노동자의 이익이 아닌, 노동단체 지도부의 주도권을 둘러싼 비노동자적 이익 때문이었는데, 이를 일제가 교묘히 부채질함으로써 더욱 격렬하게 확대되었다. 이러한 지도부의 분열과 비노동자적 노동운동의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 1924년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되었으며, 이 때 이 단체도 통폐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