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대한국 식민정책은 이간 책동이 중심이 되었던 고등경찰정책으로 전환되었다. 따라서 1920년대 초에 『조선일보』·『동아일보』·『시대일보』의 3개 민간 신문이 허가되어 간행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지식인들은 세력 형성을 위한 노동조합이나 그 연구를 위한 조직체의 결성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였다. 이에 찬성한 지식인들이 당시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각종 노동자 조직을 결합하는 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전국적 노동자 조직을 결성하는 데 앞장선 인물은 1919년 서울에서 이 운동에 종사하던 박중화(朴重華)·오상근(吳詳根)·박이규(朴珥圭) 등 10여 명이었다. 이들은 1920년 9월 말경 서울 천도교강당에서 이 단체를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일제하 노동자들의 권익 옹호를 비롯해 노동 시간과 노동 조건, 임금의 개선을 주된 목적으로 하면서, 이를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그 결과를 당국에 건의해 실제에 반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정책 방향이자 강령으로 표방하였다.
이들 10여 명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노동자 조직을 총망라한다면 커다란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더욱 깊이 연구하였다. 즉 조선 노동자들의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모아 회원으로 포섭, 집결시켜 활용한다면 노동자들의 권익 옹호와 배일 투쟁에 효과적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와 같은 과제를 연구한 결과, 1920년 서울에서 150여 명 규모의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를 조직하였다. 그 후에도 노동자들의 권익 옹호와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1945년까지 일제와 부단히 타협과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이러한 활동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