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금봉(車今奉)은 1898년 서울 출생으로,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한 후 미동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17년 4월부터 용산 기관차화부로 일하였다. 3 · 1운동 당시 서울에서 전개된 노동자들의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1920년 2월 조선노동문제연구회 제1차 토의에 발기인으로 참가하였고, 그해 4월 조직된 조선노동공제회 창립대회에서 교양부 간사로 선임되었다. 1922년 최상덕(崔上德) 등과 함께 조선노동공제회에서 지식인 간부를 배척하는 운동을 전개하였고, 9월에는 조선노동공제회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1923년 조선금물직공조합과 경성신문배달조합의 창립에 관여하였고, 같은 해 7월에는 서울에서 전개된 유기직공 동맹파업을 지도하였다. 1923년 9월 서울파가 주도한 조선노농대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창립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5년 10월에는 을축청년회의 지도 체제를 집행위원회로 변경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6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2월에 발표된 조선노농총동맹을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으로 분리하는 노동 · 농민운동에 대한 신정책 결정 과정에 관여하였다. 1927년 1월 조선공산당 경기도 책임자가 되었다. 그해 9월에는 조선노동총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1927년 11월 밀양에서 전개된 양화직공 동맹파업을 지지하는 격문 발송이 문제가 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8년 3월 신간회 경서(京西)지회 설립을 주도하고, 설립대회에서 간사 및 신간회 전국대회 출석 대표회원으로 선임되었다. 1928년 3월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 겸 경기도 책임자가 되었다. 그해 7월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조선공산당 관련자들이 대거 체포되자 일본으로 피신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9년 3월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