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적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 이명은 전우(田友), 조동진(趙東鎭). 러시아에서는 미로노프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9살이 되던 해 어머니를 여의었으며, 이후 아버지와 계모는 고향에서 소작으로 생활하였다. 아내와 1남 1녀를 두었다.
1913년 진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6년 졸업하였다. 같은 해 6월 농업강습소에 입학하여 12월에 졸업하였다. 1917년 가을 면사무소 권업계 임시서기로 있다가 1918년 12월 그만두었다.
1919년 3월 고향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한 뒤 일제 경찰의 검거를 피해 강원도로 갔다. 같은 해 일본으로 건너가 도로공사장 인부, 인력거꾼, 신문배달부 등의 일을 하였다.
1920년 니혼대학[日本大學] 사회과 야학부에 입학, 2년을 수업하다 생활난으로 그만두었다. 이 무렵 일본의 사회주의자들과 사귀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재동경조선고학생동우회에 가입, 이기동(李起東)이 이끌던 친일단체 상애회(相愛會)에 맞서 싸웠다.
1921년 4월 사회주의 비밀결사 적권단(赤拳團-또는 義拳團이라고도 함) 결성에 참여, 반일격문을 배포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6월 동경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이 무렵 러시아의 소비에트혁명에 대해 이해하고, 일본과 싸워서 이기려면 튼튼한 조직을 바탕으로 러시아의 협력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11월 원종린(元鍾麟) 등과 함께 사회주의적 선전문을 배포하다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한때 검거되기도 하였다.
1922년 봄 국내는 물론 해외의 상해, 만주, 러시아 지역의 혁명단체들과 손을 잡을 필요성을 인식하고 조봉암(曺奉岩), 김찬(金燦) 등과 논의한 뒤 국내로 들어왔다.
4월 김한(金翰), 원우관(元友觀) 등이 만든 ‘조선공산당’이란 공산주의 그룹에 가담하고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에서 활동하였다. 8월에는 서울에서 구성된 고려공산청년회 제3차 중앙총국 위원이 되었다.
그 해 9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과 조선공산당(중립당)의 대표자격으로 베르흐네우진스크 고려공산당연합대회와 국제공산청년동맹 제3차대회에 파견되었다.
10월 베르흐네우진스크 고려공산당연합대회에 참석,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국내 활동을 비판하고 조선공산당의 중립성을 주장하였다. 이 대회가 분열되자 독자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성명서를 코민테른에 제출하였다. 11월 국제공산청년동맹 제3차 대회에 참석하였다.
1923년 봄 코민테른의 「조선 문제에 대한 1922년 12월 결정서」에 의해 결성된 코르뷰로에 참여하였다. 그 해 5월 코르뷰로에 의해 국내로 파견되어, 6월 동경을 거쳐 서울에 들어와 코르뷰로 국내지부를 점검, 지원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의 코르뷰로에 상황을 보고하였다. 9월 일부 공산주의 그룹의 반대에 직면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갔다.
같은 해 12월 코르뷰로 위원이던 이성(李成), 이동휘(李東輝)와 함께 당 건설의 기초를 국내에 둘 것과 국내 사회운동단체를 기초로 하여 해외의 혁명단체를 아우르는 민족혁명당 건설을 주장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코르뷰로에서 탈퇴하였다.
1924년 4월 코민테른의 「조선 문제에 대한 1924년 2월 결정서」에 따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책임자회의에 참석, 오르그뷰로(고려공산당 창립대표회 준비위원회) 결성에 가담하였다.
5월 오르그뷰로 파견원으로서 당대회 준비를 위한 국내대표 파견 및 국내 공산주의 그룹 통합, 각종 정보 수집을 목적으로 국내에 들어왔다. 9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제령 제7호」 위반죄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1927년 12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하여 고향에서 3개월간 요양한 뒤 서울로 올라왔다. 1928년 4월 화요파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독자적인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한 뒤, 8월 고려공산청년회 후계간부조직회를 개최하고 책임비서 겸 야체이카 책임자가 되었다.
9월 희문관(喜文舘)인쇄소 노동자의 동맹파업이 발생하자 직접 노동자를 지원하고 고용주측과 교섭을 벌이기도 하였다. 12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그 이듬해 3월 석방되었다.
1929년 4월 코민테른의 「조선 문제에 대한 12월 결정서」를 접수, 화요파 당과 공청기관을 해체하여 코민테른 파견원에 넘길 것을 결의하였다. 6월 신간회 복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이 무렵 조선노동총동맹 부활준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김한, 채규항(蔡奎恒) 등과 공산주의운동의 이론과 투쟁방침에 관해 협의하였다.
같은 해 7월 코민테른 동양부 산하 조선 트로이카 성원인 김단야(金丹冶)와 협의, 당과 공청기관을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에 이양하고 이후 유능한 인재를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보내는 일을 담당하였다. 1929년 12월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 1931년 봄 졸업하였다.
1931년 11월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고 귀국, 남해(南海) 지역에서 어장서기로 일하였다. 이 곳에서 선원들을 중심으로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려다가 1932년 12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5년을 구형받았다.
1943년에는 화요파 공산주의자 그룹 결성에 참여, 중앙위원이 되었다. 1945년 3월 이후 건국동맹 산하 군사위원회에 참여하여 노농군(勞農軍)의 편성을 계획하였다. 7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한때 구금되었다.
해방과 함께 출옥하여 조선공산당(장안파) 결성에 참여했고, 9월에는 계동 열성자대회에 참석하였다. 이후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