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해(鄭雲海)는 1893년(고종 30) 대구 출생으로, 1913년 대구 협성학교를 졸업하였다.
한일 강제 병합 후 해외로 망명하여 연해주와 만주에서 독립운동 단체에 참여하였다가 1920년 3월 귀국하였다. 그해 5월 김약수(金若水) · 정태신(鄭泰信) 등과 함께 마르크스주의를 연구, 선전할 목적으로 조선노동공제회 내에 ‘마르크스주의 쿠루쇼크(kruzhok)’를 결성하였다. 조선노동공제회의 평의원으로 같은 해 6월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 결성을 주도하였다. 1922년 대구지회 정기총회에서 총간사로 선출되었다. 1923년 2월 대구노동공제회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4년 1월 진주에서 개최된 경남노농운동자간친회(慶南勞農運動者懇親會)를 주도하였으며, 3월에는 남선노농동맹(南鮮勞農同盟)의 결성을 주도하고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4월 결성된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 창립대회에서 전형위원과 기초위원,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는 등 노농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1월에는 재일(在日) 사회주의사상 단체인 북성회(北星會) 서울 본부로 북풍회(北風會)가 결성되자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5년 2월 화요회와 북풍회가 주도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全朝鮮民衆運動者大會)의 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4월 17일 조선공산당 창당대회에 대구 지역 대표로 참석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노농부를 담당하였다. 11월에는 북풍파의 종파 행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조선공산당으로부터 정권(停權) 처분을 받았다. 12월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간 후 조선공산당 일본연락부에서 활동하였다. 1926년 7월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대구에서 신탄사업을 하였다.
1944년 건국동맹 경북지부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8 · 15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그해 10월에는 경북 관선 도(道)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