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호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3·1운동과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고 순국한 독립유공자.
이칭
이명
이경호(李景鎬), 이경호(李慶鎬), 이경호(李京浩), 이흑도(李黑島), 김여수(金麗水), 신경조(申景祚)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2년 1월 16일
사망 연도
1936년 9월 15일
출생지
황해도 옹진
대표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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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이경호는 일제강점기 1919년 황해도 옹진의 3·1운동을 계획하였으며, 1920년 상하이 임시정부의 독립공채 판매 등으로 옥고를 치렀다. 이후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하다가 1931년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직후 순국한 독립유공자이다.

정의
일제강점기 3·1운동과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고 순국한 독립유공자.
인적 사항

이경호(李京鎬)는 1882년 1월 16일 황해도 옹진에서 출생하여 1936년 9월 15일 사망하였다.

주요 활동

1907년 대한자강회 해주지회, 1908년 기호흥학회에 가입하였으며, 황해도 옹진의 온천리감리교회 전도사로 있던 중〔「판결문」에는 직업이 ‘제화업(製靴業)’으로 나온다〕 서울에서 파견된 김명신에게서 전달받은 독립선언서를 1919년 3월 1일 곽정숭 · 김선수 · 김영만 등 교인 7~8명에게 배부하며, “독립선언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취지로 설명하고, 독립선언서를 인근 교회에 전달하게 하였다. 같은 날 체포된 이경호는 4월 해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경호는 석방된 후 1921년 해주 출신 전도사 지성신으로부터 전달받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공채증서를 배포하고 『 독립신문』을 배부하다가 체포되어 8월 해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2월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이후 사회운동에 투신하여 1922년 신생활사(新生活社) 이사, 1925년 사상단체인 동진회(同震會) 집행위원, 황해도 민중운동자동맹 집행위원, 전조선노농대회 준비위원 등을 맡았다.

시대일보』 황해도 옹진지국 총무로 있던 1925년 만주에서 들어온 최창익 · 한빈 등과 연락하였다는 혐의로 검속되었으며, 1926년 조선사상총동맹과 조선민흥회 창립준비위원, 1927년 『 조선일보』 옹진지국 총무, 조선농민총동맹 중앙집행위원 등을 맡았다. 9월에는 신간회 옹진지회 간부로서 ‘청년데이’ 행사에서 연설한 것이 문제되어 검속되기도 하였다. 11월 황해기자대회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검속되었다. 1928년 1월 조선공산당 황해도책을 맡았으며, 조선공산당 제3차 대회에서 중앙 간부 선출을 위한 전형위원이 되었다.

1928년 5월경 만주로 건너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책임자로 활동하며 1929년 지린〔吉林〕에서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ML파) 재건에 참여하였다. 그 뒤 다시 국내에 들어와 서울과 흥남을 거쳐 강원도 철원에서 은거하던 중 1931년 11월경 체포되어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36년 9월 형 집행 정지로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이튿날인 9월 15일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201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삼일운동과 기독교 관련 자료집』(기독교대한감리회, 2017)
김정인·이정은, 『국내 3·1운동-중부·북부』(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강만길·성대경 엮음,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6)

신문

「ML당 이경호 14일 오후 영면」(『조선일보』, 1936. 9. 16.)
「ML당 간부 이경호 기소」(『동아일보』, 1931. 12. 9.)
「옹진청년데이 연사 2명 구속」(『조선일보』, 1927. 9. 11.)
「신민부사건 확대」(『동아일보』, 1925. 10. 31.)
「독립공채 매각한 지정신 등 판결」(『동아일보』, 1921. 8. 28.)
「유력자 6명을 해주 옹진에서 체포」(『동아일보』, 1921. 7. 11.)

판결문

「판결문」(고등법원 형사부, 1919. 7. 10.)
집필자
한규무(광주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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