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호(李京鎬)는 1882년 1월 16일 황해도 옹진에서 출생하여 1936년 9월 15일 사망하였다.
1907년 대한자강회 해주지회, 1908년 기호흥학회에 가입하였으며, 황해도 옹진의 온천리감리교회 전도사로 있던 중〔「판결문」에는 직업이 ‘제화업(製靴業)’으로 나온다〕 서울에서 파견된 김명신에게서 전달받은 독립선언서를 1919년 3월 1일 곽정숭 · 김선수 · 김영만 등 교인 7~8명에게 배부하며, “독립선언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취지로 설명하고, 독립선언서를 인근 교회에 전달하게 하였다. 같은 날 체포된 이경호는 4월 해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경호는 석방된 후 1921년 해주 출신 전도사 지성신으로부터 전달받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공채증서를 배포하고 『 독립신문』을 배부하다가 체포되어 8월 해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2월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이후 사회운동에 투신하여 1922년 신생활사(新生活社) 이사, 1925년 사상단체인 동진회(同震會) 집행위원, 황해도 민중운동자동맹 집행위원, 전조선노농대회 준비위원 등을 맡았다.
『 시대일보』 황해도 옹진지국 총무로 있던 1925년 만주에서 들어온 최창익 · 한빈 등과 연락하였다는 혐의로 검속되었으며, 1926년 조선사상총동맹과 조선민흥회 창립준비위원, 1927년 『 조선일보』 옹진지국 총무, 조선농민총동맹 중앙집행위원 등을 맡았다. 9월에는 신간회 옹진지회 간부로서 ‘청년데이’ 행사에서 연설한 것이 문제되어 검속되기도 하였다. 11월 황해기자대회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검속되었다. 1928년 1월 조선공산당 황해도책을 맡았으며, 조선공산당 제3차 대회에서 중앙 간부 선출을 위한 전형위원이 되었다.
1928년 5월경 만주로 건너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책임자로 활동하며 1929년 지린〔吉林〕에서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ML파) 재건에 참여하였다. 그 뒤 다시 국내에 들어와 서울과 흥남을 거쳐 강원도 철원에서 은거하던 중 1931년 11월경 체포되어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36년 9월 형 집행 정지로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이튿날인 9월 15일 순국하였다.
201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