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3·1운동을 주도하여 옥고를 치른 독립유공자.
인적 사항
주요 활동
대구 계성중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던 중에 3 · 1운동 소식을 듣고, 1919년 2월부터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있던 대구 장로교 남성정교회 이만집 목사는 장로교 신정교회에 다니던 그에게 신정교회 교인들 성경학교 및 계성학교 학생들의 동원을 요청하였다. 3월 6일 대구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자 이만집 목사와 같은 학교 교사인 백남채 등과 3월 8일 서문시장 장날을 이용하여 거사에 나설 것을 계획하였다. 또한, 계성학교 학생 7~8명에게 교내 아담스관 지하실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도록 지시하였다.
같은 해 서문시장 장날인 3월 8일 장로교 교인 및 계성학교 · 신명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만세 시위에 나서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흔들며 본정(本町)과 경정(京町)을 거쳐 동성정(東城町)까지 행진하였다. 이때 김영서는 검문을 피하여 잠시 은거해 있다가 3월 10일 학생 김삼도 · 박성용 · 박재헌 · 박태현 · 이석도 등과 덕산정 시장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다 검거되었다.
1919년 4월 대구지방법원과 5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후 1920년 7월 21일 출옥하였다. 이후 교남학원 교사, 민립대학설립기성회 대구부지방부 집행위원, 대구법전학원 교사 등을 지냈으며, 1921년 신정교회에서 달서유치원을 설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1928년 교남학원의 고등보통학교 승격을 위하여 경상북도 일대를 순회하였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원전
- 『고등경찰요사』(경상북도 경찰부, 1934)
단행본
- 『삼일운동과 기독교 관련 자료집』(기독교대한감리회, 2017)
- 김진호·박이준·박철규, 『국내 3·1운동-남부』(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계성백년사(1926~2006)』(학교법인 계성학원, 2006)
- 『독립유공자 공훈록』 2(국가보훈처, 1987)
논문
- 권영배, 「대구지역 3·1운동 전개와 주도층」(『한국사연구』 6, 한국사연구회, 1997)
신문
- 「대구만세운동 주동 김영서옹 별세」(『동아일보』, 1975. 12. 13.)
- 「대구교남학원 승격을 운동」(『조선일보』, 1928. 4. 11.)
- 「법전학원 개학」(『동아일보』, 1927. 12. 10.)
- 「민대 지방부」(『조선일보』, 1923. 6. 25.)
- 「김·백 양씨 출감」(『동아일보』, 1920. 7. 26.)
판결문
- 「판결문」(고등법원 형사부, 1919. 7. 21.)
- 「판결문」(대구복심법원, 1919. 5. 31.)
- 「판결문」(대구지방법원, 1919.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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