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서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대구3·1운동을 주도하여 옥고를 치른 독립유공자.
이칭
좌천(佐川)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2년 11월 23일
사망 연도
1975년 12월 13일
출생지
부산
대표 상훈
대통령 표창(1977)|건국훈장 애족장(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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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김영서는 일제강점기 대구 계성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중에 3·1운동 소식을 듣고 1919년 3월 10일 대구 만세 시위를 주도하여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에도 민립대학설립기성회 대구부지방부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한 독립유공자이다.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3·1운동을 주도하여 옥고를 치른 독립유공자.
인적 사항

김영서(金永瑞)는 1882년 11월 23일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255번지에서 태어났다. 호는 좌천(佐川)이다.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하였다.

주요 활동

평양 숭실학교 재학 중인 1905년 11월 을사조약에 체결되자 동료 12명과 함께 대한문 앞에서의 조약 반대 투쟁에 동참하였다고 하며, 1911년 대구 계성학교에서 물리, 화학, 식물, 법제 등을 지도하였다.

대구 계성중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던 중에 3 · 1운동 소식을 듣고, 1919년 2월부터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있던 대구 장로교 남성정교회 이만집 목사는 장로교 신정교회에 다니던 그에게 신정교회 교인들 성경학교 및 계성학교 학생들의 동원을 요청하였다. 3월 6일 대구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자 이만집 목사와 같은 학교 교사인 백남채 등과 3월 8일 서문시장 장날을 이용하여 거사에 나설 것을 계획하였다. 또한, 계성학교 학생 7~8명에게 교내 아담스관 지하실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도록 지시하였다.

같은 해 서문시장 장날인 3월 8일 장로교 교인 및 계성학교 · 신명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만세 시위에 나서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흔들며 본정(本町)과 경정(京町)을 거쳐 동성정(東城町)까지 행진하였다. 이때 김영서는 검문을 피하여 잠시 은거해 있다가 3월 10일 학생 김삼도 · 박성용 · 박재헌 · 박태현 · 이석도 등과 덕산정 시장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다 검거되었다.

1919년 4월 대구지방법원과 5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후 1920년 7월 21일 출옥하였다. 이후 교남학원 교사, 민립대학설립기성회 대구부지방부 집행위원, 대구법전학원 교사 등을 지냈으며, 1921년 신정교회에서 달서유치원을 설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1928년 교남학원의 고등보통학교 승격을 위하여 경상북도 일대를 순회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에 대통령 표창을 받았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고등경찰요사』(경상북도 경찰부, 1934)

단행본

『삼일운동과 기독교 관련 자료집』(기독교대한감리회, 2017)
김진호·박이준·박철규, 『국내 3·1운동-남부』(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계성백년사(1926~2006)』(학교법인 계성학원, 2006)
『독립유공자 공훈록』 2(국가보훈처, 1987)

논문

권영배, 「대구지역 3·1운동 전개와 주도층」(『한국사연구』 6, 한국사연구회, 1997)

신문

「대구만세운동 주동 김영서옹 별세」(『동아일보』, 1975. 12. 13.)
「대구교남학원 승격을 운동」(『조선일보』, 1928. 4. 11.)
「법전학원 개학」(『동아일보』, 1927. 12. 10.)
「민대 지방부」(『조선일보』, 1923. 6. 25.)
「김·백 양씨 출감」(『동아일보』, 1920. 7. 26.)

판결문

「판결문」(고등법원 형사부, 1919. 7. 21.)
「판결문」(대구복심법원, 1919. 5. 31.)
「판결문」(대구지방법원, 1919. 4. 18.)
집필자
한규무(광주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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