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집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및 대구 지역 3·1운동과 교회 자치선언을 주도한 개신교 장로교계의 목사이자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5년 7월 7일
사망 연도
1944년 6월 8일
출생지
경상북도 월성군
대표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이만집은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및 대구 지역 3 · 1운동과 교회 자치선언을 주도한 개신교 장로교계의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대구 감옥에서 복역하였다. 1923년 4월 한국 교회의 자치운동을 강조한 교회 자치선언을 주도하였고, 조선예수교 봉산교회를 설립하는 등 신앙생활에 전념하다 1944년 6월 8일 사망하였다.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및 대구 지역 3·1운동과 교회 자치선언을 주도한 개신교 장로교계의 목사이자 독립운동가.
인적 사항

경상북도 월성군 강동면 호명리 출신으로, 1875년 7월 7일 출생하였다.

주요 활동

어려서 한학(漢學)을 공부하였으나, 1900년 경상북도 경주읍에서 선교사 제임스 아담스(James E. Adams)[한국명 安義窩]를 만난 후 기독교를 수용하였다. 1906년 제임스 아담스가 설립한 대구의 계성학교(啓聖學校)에 한문 교사로 초빙되었다.

1909년 7월 대구 남성교회(南城敎會)의 장로가 되었으며, 1912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신학을 공부하였다. 1917년 학교를 졸업한 후, 9월에 남산교회(南山敎會) 목사가 되었다.

1918년 남성교회 홍승한(洪承漢) 목사가 중국 지역 선교사로 파송됨에 따라, 2월 10일 후임 목사로 부임하였다. 같은 해 9월 15일에는 대구 지역 개신교 목사와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조직한 교남기독청년회(嶠南基督靑年會) 회장으로 선출되어 대구 · 경북 지역의 청년운동을 이끌었다.

1919년 2월 24일 3 · 1운동의 지역적 확산을 위해 대구로 내려온 이갑성(李甲成)을 만나 운동의 상황을 파악하였으며, 3월 4일 독립선언서 200장을 전달받았다. 이후 남산교회 조사(助事) 김태련(金兌鍊), 신정교회(新町敎會) 장로로 계성학교 교사 김영서(金永瑞) 등과 함께 3 · 1만세운동에 대한 계획을 논의하였다.

만세운동은 3월 8일 오후 3시 대구서문시장에서 계성학교, 대구고등보통학교, 신명여학교 등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전개되었다. 그는 시위 현장에서 지금이야말로 조선이 독립할 시기로서 각인(各人)은 독립의 희망을 품고 스스로 이것을 이룰 것을 바라며, 힘차게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라는 취지의 연설을 하였다.

이날의 시위로 김태련, 김영서, 정재순(鄭在淳), 계성학교 교사 백남채(白南埰), 최상원(崔相元), 권의윤(權義允), 최경학(崔敬學) 등 157명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이 가운데 67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시위를 주도한 그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대구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아 대구감옥에서 복역하였고, 1921년 2월 출옥하였다.

학문과 저술/ 사상과 작품

1923년 4월 3일 한국 교회가 선교사의 정신적 지배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치하는 민족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교회 자치선언 사건으로 경북노회(慶北老會)에서 제명당하였다. 10여 년간의 법정 투쟁이 지속되는 가운데 1931년 11월 조선예수교 봉산교회(鳳山敎會)를 독자적으로 설립하였다.

1936년 봉산교회를 떠나 금강산에 수양관을 세우고 신앙생활에 전념하던 중 1944년 6월 8일 사망하였다. 2005년 6월 7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산하 대구인권위원회에서는 그의 복권(復權)을 결정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9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김건회 외, 『국내 3.1운동Ⅱ- 남부』(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김남식, 『이만집목사 생애와 사상』(새순출판사, 198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국가보훈처, 1971)

논문

정태식, 「3.1운동에 나타난 지식인들의 역할과 한계에 대한 역사사회학적 일고찰」(『대구사학』 137, 대구사학회, 2019)
정경호, 「대구 3.1 만세운동을 주도한 민족지도자 이만집 목사의 자주적 민족신앙 연구」(『신학과 목회』 25, 영남신학대학교, 2006)

판결문

「판결문」(대구지방법원, 1919.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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