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연당(硏堂). 경상북도 대구 출신. 1915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최연소자로 청년층을 대표하여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민족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비롯한 각급 학교의 시위운동을 주도하고 태화관(泰和館)을 중심으로 한 민족대표의 서명운동과 전단 살포의 중책을 맡아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6년 YMCA의 이사를 맡아 청년들을 지도하였으며, 1931년 경성공업(京城工業)의 지배인을 지냈다. 같은 해 신간회사건(新幹會事件)으로 상해(上海)로 망명했다가, 귀국한 뒤 1940년 흥업구락부사건으로 체포되어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독립촉성국민회(獨立促成國民會) 회장을 지냈으며, 1947년 김규식(金奎植) 등과 협력해 과도입법의원의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제2대 민의원에 당선했고, 1952년 국민회(國民會)의 최고위원에 추대되었다. 1953년 자유당 최고위원에 임명되었고, 33인유족회장·국산부흥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 발기위원을 지냈고, 1965년 광복회장, 이준열사기념사업회(李儁烈士記念事業會) 총재를 맡았다. 삼일동지회(三一同志會) 고문을 지내기도 했다. 80세 이후에는 민족대표 33인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해마다 거행되는 3·1기념행사에 참석하다가 여생을 마쳤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