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신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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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평양에 설립되었던 기독교교육자 양성기관.
내용 요약

평양신학교는 1901년 평양에 설립되었던 기독교 교육자 양성기관이다. 초대 교장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모페트였다. 1938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우상숭배를 거부하며 신학교를 폐쇄하였다. 1940년 9월 서울에서 김재준을 중심으로 조선신학원이 경기도 지사의 인가를 얻어 개원하였다. 이것이 오늘의 한신대학교 신학부이다. 1959년 장로교회가 합동파와 통합파로 분립할 때, 통합 장로회에서 학교를 개편하여 1961년 장로회신학대학으로 승격 발전하였다. 이것이 평양신학교의 정통 후신이다.

목차
정의
1901년 평양에 설립되었던 기독교교육자 양성기관.
개설

장로교주1의 선교부와 조선 예수교 장로회 공의회가 평양에서 개설한, 장로교 교역자(敎役者) 목사 교육기관이다.

연원 및 변천

초대 교장에는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 모페트(Moffett,S.A.)였으며, 학생은 평안남도 출신의 김종섭(金宗燮)과 방기창(訪基昌)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1907년 최초의 졸업생을 배출할 때의 재적 학생수는 75명에 이르고 있었다.

초기 신학생들은 대개 다 교회의 지도자로서 장로(長老) 조사(助師)직에 있었기 때문에 신학교에 와서 학습할 시간이 제한돼 있었고, 따라서 1년에 3개월만 학교에 출석하게 해서 5년간에 수업하는 제도를 채택하였었다. 1920년이 되어서야 학제가 1년 2학기 3년 과정의 전문학교 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때의 등록 학생수는 138명으로서 실상 세계에서 신학교로서는 가장 큰 수의 학생을 교수하는 곳으로 이름 나 있었다.

그러나 이들 신학생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아니었고, 따라서 교수 과목도 이론적 신학 분야보다는 거의 전적으로 성경(聖經) 공부에 집중하고 있었다. 따라서 교회사(敎會史)나 조직신학 · 실천신학 · 교양과목들이 있었지만 실상은 교회 일군 양성을 위한 성경학원 정도의 수준 밖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평양신학교의 건물은 시카고의 사이러스 맥코믹(Cyrus McComick) 여사의 기부금 1만1천불로서 건립하였다. 건물은 1908년 5월 19일 정초식을 거행하고, 그 해 10월에 완공을 보았다. 평양 하수구리 100번지, 5,000여평의 땅에 세워진 신학교 교사는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시설에서는 훌륭하였다.

교수진은 이 신학교를 돕는 네 개의 선교단체, 곧 미국 북장로교, 미국 남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호주 장로교에서 각각 교수들을 책임 파송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선교사들만으로 구성되었던 교수진에 한국인 김선두(金善斗)가 강사로 취임한 것은 1924년이었고, 1925년에는 남궁혁(南宮爀) 박사가 조교수로 정식 취임하였다.

‘신령(神靈)한 목사’라는 교육목표는 한국 신학교육의 보수주의적 성격을 대변하였고, 심지어 신학 졸업생의 해외 유학을 막던 선교사들은 한국 장로교의 지적 발전을 경계한 셈이었다. 더구나 1918년에는 새로운 신학 사조(思潮)의 침투를 저지한다 해서 외국이나 혹은 다른 교파의 신학교에서 교육 받은 학생은 장로회 평양신학교 별신학과(別神學科)에서 신경정치규칙(信經政治規則)을 의무적으로 강습 받도록 하였다.

1938년 일제의 주3 강요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선교사들은 우상숭배를 절대로 할 수 없다 해서 평양신학교를 폐쇄하였다. 이것은 신학교육에서 보수주의적 선교사들이 퇴진한 것을 의미했다. 장로회 총회는 사태를 방치할 수 없었다. 이미 신사참배가 국가의식(國家儀式)이라 결의한 뒤었으니만큼, 그 재건을 서둘렀다.

1939년 총회는 ‘평양신학교’의 설립을 결정하고 인가신청을 내어 1940년 2월 9일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자유주의 신학사상이 농후한 채필근(蔡弼根) 목사를 교장으로 해서 새 출발을 하였다. 교수 두 사람중 하나는 일본인 다나까(田中理夫)였다. 1940년 9월 서울에서는 김재준(金在俊)을 중심으로 조선신학원이 경기도 지사의 인가를 얻어 개원하였다. 이것이 오늘의 한신대학교(韓神大學校) 신학부이다.

종전(終戰)과 함께 서울에 피난 온 평양신학교는 한양교회사 성도(聖都)교회에서 임시수업을 시작하고, 소위 조선 신학파와의 신학논쟁 틈에서 조선신학원의 김재준 목사를 이단시하면서 1949년 보수주의를 표방한 장로회신학교로 발전하였다. 이것이 장로교 총회의 유일한 직영 신학교라는 의미에서 총회신학교로 개칭한 것이 1950년이다.

장로교회가 1959년 합동파(合同派)의 통합파(統合派)로 분립할 때 그 주류파로 자처한 통합 장로회에서는 다시 그 신학교를 개편하여 주2의 대학 인가를 얻어 1961년 장로회신학대학으로 승격 발전하였다. 이것이 평양신학교의 정통(正統) 후신이다.

참고문헌

『장로회신학대학칠십년사』(장로회신학대학, 1971)
『한국기독교회사』(민경배, 대한기독교서회, 1972)
『한국기독교교회사』(대한기독교교육협회, 1974)
주석
주1

개신교의 한 파. 가톨릭교의 교황권을 부정하고 교회의 운영을 장로들의 합의제로 하자는 칼뱅의 장로주의에서 이루어졌다. 우리말샘

주2

교육 및 학술 진흥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중앙 행정 기관. 1990년 12월에 ‘교육부’로, 2001년에 ‘교육 인적 자원부’로 개편되었다. 우리말샘

주3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우리의 종교와 사상 자유를 억압하기 위하여 신사에 배례하도록 강요하던 일. 우리말샘

집필자
민경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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