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숙천 출생. 작곡가 동진(東振)의 아버지이다.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거쳐 1927년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안주 동부교회를 비롯하여 평양 창동교회 등에서 목회활동을 하였다.
3·1운동 때에는 아버지와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광복 이후 남북통일과 강력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서는 기독교신앙의 원리에 입각한 정당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 아래 정치활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11월, 정주의 옥호동 약수(藥水)에서 교회의 지도급인사들과 기독교자유당의 정강을 마련하고 창당을 서둘렀지만 여러 가지 난관에 부닥쳐 지연되었다.
1947년 9월 UN총회에서 한국문제가 상정된다는 소식을 듣고 통일정부 수립이 시급하다고 판단, 김관주(金冠柱)·황봉찬(黃鳳燦)·우경천(禹敬天) 등과 함께 장로 고한규(高漢奎)를 당수로 하여 기독교자유당 발족을 서둘렀다.
창당일은 1947년 11월 19일로 계획되어 있었으나 그 전날 내무서(內務署)에 탐지되어 40여명의 교회지도자들과 함께 투옥되었다. 이때부터 기독교는 북한에서 대대적인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종교적 신앙과 정치적 이념을 결합시키려는 시도는 좌절되었다.
그는 13년 징역형을 받고 탄광에서 강제 노역 중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저서로 설교집 두 권과『빌립보서강해』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