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 모펫(Moffett, S. A.)이 평양에 선교사업을 위해 정착하면서 한석진(韓錫晉)을 조사(助師)로 삼아 널다리(板洞)에 세웠던 회당으로 처음에는 교회 이름을 ‘판동’ 또는 ‘널다리교회’라고 하였다. 그 후 1899년장대현(장대재)교회로 바꾸었다.
이 교회로부터 강서의 탄포리교회(灘浦里敎會) · 청산포교회(靑山浦敎會), 대동군의 태평(太平) 외리교회(外里敎會), 중화군의 읍내교회(邑內敎會) 등 여러 교회가 파생, 발전하여 서북계 신앙의 발상지로서 기초적 소임을 다하였다.
1899년 이 교회에서는 병인양요 때 중군(中軍)으로 활약하여 관찰사 박규수(朴珪壽)의 포계(褒啓)로 안주 우후(虞候)라는 직책을 받은 바 있던 박춘곤(朴春坤)이 세례를 받으면서 신도가 급증하여, 교회당을 장대현에 건립하게 되었다. 한국인 교인들의 헌금액 5,000여 원과 선교사 보조금 수천 원으로 72칸의 교회당 건립에 착수하여, 1900년 준공하였다.
그 해 장대현교회는 김종섭(金鍾燮)을 장로로 장립(將立:안수하여 교직을 주는 일)하여 당회(堂會)를 조직하였다. 예배당은 ㄱ자로 건립되어 한때 남녀가 따로 한쪽 칸을 차지하여 앉도록 한 일도 있었다. 1898년 봄, 이 교회당에서 여신도 이신행(李信行) · 박관선(朴寬善) · 김성신(金聖信) 등을 중심으로 부인 전도회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한국 근대사에서 어떤 형태로든 여자들만으로 구성된 기독교 이념의 목적적 조직체로는 최초의 것이었다.
박관선은 1909년 제주도에서 선교활동을 벌여 여권 신장에도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길선주(吉善宙)가 이 교회의 시무(視務)목사로 취임한 것은 1907년의 일이었다. 광복 후인 1946년 3월에는 3·1절 기념예배를 둘러싸고 신도들이 공산정권에 항거한 사건이 일어나 큰 피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