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정주 출신. 30세 이전까지의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평안북도 곽산의 천체동교회(天體洞敎會)에서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1938년 장로교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교단을 떠나 김윤섭(金潤燮)·신옥녀(申玉女) 등과 함께 만주로 이주하였다.
당시 봉천노회(奉天老會) 소속이었던 선교사 헌트(Hunt, B. F., 韓富善) 역시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국내의 한상동(韓尙東)·이기선(李基宣)·주기철(朱基徹)·김인희(金麟熙)·김형락(金灐樂) 등과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추진하였다.
1940년 7월 국내의 신사참배반대자 일제검거 때 김윤섭 등과 붙잡혀 심한 고문을 받고 징역 13년을 언도받았다. 봉천형무소로 이감되어 복역 중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