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는 오타와(Ottawa)이다. 면적은 998만 4670㎢로 10개 주 및 3개의 준주(準州)로 구성되어 있고, 러시아에 이어 세계 제2위이며, 한반도의 45배이지만 대부분 한랭지대이다.
미국과 국경을 이루는 남부지방이 온대로서 전체인구의 80%가 이 지역인 퀘벡 · 온테리오 2개 주를 중심으로 5대호와 세인트로렌스강 유역에 밀집되어 있다.
인구는 1989년 2,606만 5,000명이었으나 2015년 현재 3509만 9836명 으로, 영국계 21%, 불란서계 15.8%, 스코틀랜드계 15%, 아이리쉬계 13.9% 등 유럽계 백인 80% 내외, 여타 지역 유색인종 이민계가 20% 차지한다.
언어는 1969년의 공용어법에 의하여 영어 ·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지정하였으나, 양국어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사람은 불과 12.2%이고, 67%가 영어만 사용하는 반면, 18%가 프랑스어만 사용하며, 인구의 1%는 공용어 중 어느 언어도 사용하지 못한다. 종교는 가톨릭교(46%), 개신교 캐나다연합교회(18%), 성공회(12%), 루터교 · 침례교(24%) 등의 분포를 나타내고 있다.
1497년 영국인이 최초로 뉴펀들랜드를 발견하였고, 1553년 프랑스인이 상륙한 이래 영국 · 프랑스간 세력확대 분쟁이 계속되었다. 1756∼1763년의 7년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여 파리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영국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었다.
북미합중국의 탄생과 더불어 미국측의 합병을 위한 움직임을 견제해야만 하였으며, 1867년 영국은 캐나다식민지를 정치적으로 통합함으로써 캐나다자치령이 인정되었다. 1931년 영연방의 일원으로 독립국이 되었으며, 1951년에는 정식국명을 캐나다자치령에서 캐나다로 변경하였다.
1965년에 현재의 국기를 정식으로 선언하였고, 국가(國歌)도 새로 제정하였다. 1982년에 독자적인 캐나다헌법이 선포됨에 따라 영연방의 일원으로 존속하면서도 영국과의 기존 법적 종속관계를 완전히 청산하여 명실상부한 주권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정치체제는 연방제에 바탕을 둔 입헌군주국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내각책임제의 연방공화국이다. 영국 국왕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Ⅱ)를 국가원수로 하고, 그 아래 국왕이 임명하는 총독이 있으나, 하원의 다수당이 구성하는 내각이 실질적인 행정권을 행사하며 수상이 그 수반이다.
입법부는 상하 양원으로 구성된다. 상원은 104인으로 총독이 임명, 임기는 75세이고, 하원은 282인, 임기 5년이다.
정당은 양당제로서 자유당과 진보보수당이 1867년 이래 교대로 집권해 오고 있다. 자유당은 전통적으로 친미적이었으나 근래에는 거리를 두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고, 진보보수당은 근본적 태도는 자유당과 같으나 영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주장하고 있다.
대외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몫은 미국과의 관계가 차지하고 있으나, 동서 양진영 가운데에서 독자적이며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자연자원이 풍부한 자원공급국으로서, 경제는 대외무역 의존도가 높다.
총 무역량의 70% 이상이 미국과 이루어지며, 주요 산업을 지배하고 있는 외국자본의 80%가 미국자본으로 미국경제와 깊이 밀착되어 있다. 재정적자 축소노력을 하고 있으며, 물가 안정을 기반으로 한 고용증대에 주력하고 있다.
국민총생산은 1988년 4542억 캐나다달러이고, 1인당 국민소득은 1만 5414 캐나다달러였으나, 2015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1조 7938달러이고, 1인당 국민소득은 약 5만 577 달러이다. 무역은 1988년의 경우 수출 1,162억 2000만 달러(자동차 · 원유 · 천연가스 · 목재), 수입 1,116만 달러(기계류 · 식료품 · 수송장비 · 화학제품)를 기록하였으나, 2015년 현재 수출은약 5234억 달러이고, 수입은 약 5109억 달러이다.
학제는 유아원 · 국민학교(1∼8학년) · 중등과정(9∼12학년)으로 되어 있으나, 근래에 와서 중학교(7∼9학년), 고등학교(10∼13학년) 제도와 학년제 진급이 아닌 과목별 진급제의 도입으로 새로운 변혁이 일고 있다. 중등과정 이후는 학위가 없는 지역사회대학 및 취업학교(총 300개 이상)와 학위가 수여되는 대학 및 병설대학 등이 있다.
복합문화정책에 따라 소수민족의 모국어 교육기관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캐나다는 점차 이민통제를 강화하고 있으나, 캐나다시민, 영주권자의 가족재결합과 국제난민의 이민율은 증가하고 있으며, 기업이민도 장려하고 있다.
캐나다에는 다양한 사회복지제도가 마련되어 있는데, 퇴직 후 지급되는 연금계획을 비롯하여, 65세 이상에게 매월 지급되는 고령연금, 18세 이하 어린이에게는 가족수당이 지급되며, 퇴직연금 · 실업보험 등이 있다.
언론은 정치형태와 마찬가지로 철저한 지방분권제로서 141개 일간지가 모두 지방신문이다. 방송의 경우도 라디오 570개 국, 텔레비전 114개 국이 있으나 지역프로그램 중심이다. 미국 매체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고 있으며, 여론도 미국 여론에 크게 좌우된다.
1889년 선교사를 보내자는 호소문을 계기로 우리나라와의 관계는 시작되었다. 토론토대학의 YMCA가 게일(Gale, J. S., 奇一)과 펜윅(Fenwick, M. C.) 목사를 각각 파송하였다.
게일은 1892년까지 한국 전역에 걸쳐 전도하였고, 그 기록을 남겼다. 침례교인인 펜윅 목사는 원산을 본거지로 선교하면서 한국순회교회를 조직하여 포교하였고, 토론토의 후원은 1898년까지 계속되었다.
캐나다장로회는 1894년에 매켄지(Mckenzie,W.J.) 목사가 개인으로 내한하여 황해도 송천에서 전도하다가 죽은 뒤 한국선교를 의결하고, 1898년 9월에 그리어슨(Grierson, R., 具禮善) 목사 · 푸트(Foote, W. R., 富斗一) 목사 · 매크레(McRae, D. M., 馬求禮) 목사를 파송하여 함경도를 중심으로 선교하였다.
국가간의 정치적 외교는 1949년 4월 캐나다가 대한민국을 승인한 이후에 이루어졌으며, 1950년 6·25전쟁 때에는 유엔연합군으로 참전하였다. 1950년 당시 캐나다는 극동과는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었고, 한국에는 대표부조차 두지 않고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 후 겨우 평화질서를 찾은 때였으나 북한군의 침략에 맞서 인접한 미국과 유엔결의를 열렬히 지지하고, 유엔의 통제와 권위 밑에서 평화회복을 위한 집단안보활동의 일부를 담당하는 의미에서 한국전 참전을 결정하였다.
참전규모는 육해공군으로 육군 3개 보병대대, 해군 구축함 3척, 공군 1개 비행중대였다. 육군 총연병력(1953년 7월 27일까지) 2만 1940명, 최고 유지병력 8,123명(1952년 1월), 휴전 당시 유지병력은 7,134명이었다. 사상자는 전사 309명(장교 11), 전상 1,202명(장교 59), 실종 32명(장교 2)으로 총 1,543명(장교 72)인데 실종 32명은 포로로서 전원 송환되었다.
캐나다 육군은 영연방 제27보병여단에 배속되어 미제9군단의 지휘 아래 선더볼트작전 · 킬러작전 · 리퍼작전 등에 참여하였고, 가평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대통령부대표창을 받았다. 그 밖에 백일리전투 · 철원지구 정찰권 더크작전 · 클래이모어작전 · 코만도작전 · 페퍼포트작전 등에 참여하였다.
1963년에 처음으로 주캐나다 대사(겸임)가, 1964년에는 주한 캐나다대사(겸임)가 각각 임명되었고, 1964년 8월에 주캐나다 한국대사관이, 1974년 1월에 주한 캐나다대사관이 설치됨에 따라 양국관계가 정상궤도에 올랐다. 1970년과 1975년에는 주밴쿠버 총영사관과 주토론토총영사관도 각각 개설되었다.
그 뒤 1979년 2월에 우리나라 외무장관이 캐나다를 공식방문하였는데, 같은 해 11월에 캐나다의 상원의장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조문사절단을 인솔하고 방한하였다. 1980년에 주몬트리올총영사관이 개설되었다.
1981년 3월에 상원의장이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취임경축특사로 왔으며, 같은 해 캐나다에서 열린 연례통상장관회담에 우리나라 상공부장관이 참석하였다. 또한 한 · 캐나다의원친선협회의 양국대표단의 상호방문도 이루어졌다.
캐나다의 트뤼도(Trudeau, P.) 수상이 1981년 9월 방한함에 따라 전두환 대통령은 1982년 8월 아프리카 4개국 순방 후 캐나다를 공식방문하였다. 이 후 여러 고위장관급 인사의 상호방문교류가 이루어졌으며, 국제의원연맹 등 국제회의에 상호 참가하였다. 1984년 캐나다의 자유당 전당대회와 진보보수당 신정권수립 최초의 하원개원 때도 우리나라 의원대표가 참석하였다.
남북한 분단상황에 대한 캐나다의 정책은 남한 정부를 지지하는 정책으로, 북한과의 공식적 외교관계는 없다. 캐나다는 남북대화를 통한 우리 나라의 평화통일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양국간에는 무역협정(1966.12.) · 경제기술협력협정(1971.4.) · 원자력개발 및 응용에 관한 협정(1976.1.) · 이중과세방지협정(1978.2.) · 공업소유권 부여와 보호에 관한 협정(1979.2.) · 방산품(防産品) 품질보증 협정(1984.11.) · 항공협정(1988.12.) · 사회보장협정(1997.1.) 등을 체결하고 있다.
양국의 통상관계는 1988년의 경우 대한 수출 9억 6900만 달러(석탄 · 광물 · 펄프)이고, 수입은 14억 5079만 3761달러(의류 · 기계류 · 전자제품)를 기록하였으나 2015년 현재 대한 수출은 41억 6000만 캐나다달러이고, 수입은 72억 5000만 캐나다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북한과는 1987년의 경우 대북한 수출 581만 달러(소맥 · 사무용구), 수입 134만 달러(의류 · 야채류)를 나타내었다.
캐나다에 진출한 우리나라 은행으로는 외환은행과 한일은행이 있으며, 우리나라에 있는 캐나다은행에는 몬트리올은행 · 노바스코샤은행과 로열은행 · 내셔널은행 등이 있다.
포항제철의 석탄광개발은 투자규모 5,900만 캐나다달러, 참여지분 20%로 1983년 9월에 준공하여 생산을 개시하였으며, 쌍용의 석탄광개발은 투자규모 135만 캐나다달러, 참여지분 15%였다.
우라늄광개발에 있어 한국전력의 경우 1983년에 투자규모 270만 캐나다달러, 대우의 경우 1982년에 투자규모 400만 캐나다달러이며, 투자지분에 있어서는 각각 4.5%와 10%였다.
1990년대에 들어와 정부투자기관으로서는 KOTRA와 한국전력이 진출하여 있다. 장기수입계약을 맺고 있는 것은 한국전력의 발전용 탄, 포항제철의 유연탄, 쌍용의 석탄, 온산 동제련소의 동정광(銅精鑛) 등이다.
IDRC는 1976년 9월 우리나라와 기술협력협정을 체결하였고, NRC는 한국표준연구소 및 한국과학재단과 기술교류하고 있다. 1976년 1월 한 · 캐나다원자력협정체결 결과 1982년 3월에 한 · 캐나다원자력기술협력회의 및 공동상설위원회의 설치로 원자력기술협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밖에 민간기업체의 기술협력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1977년 캐나다로부터 은대구 250쿼터를 배정받은 바 있다.
1990년 9월 캐나다와 문화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하였으며, 양해각서 체결 이전에도 민속예술단 등 민간단체의 문화교류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리틀앤젤스가 1971년부터 4회 캐나다에서 공연하였으며, 국립무용단이 1982·1984년(2회), 국립국악원연주단이 1972·1979년(2회), 선명회합창단이 1972년에 공연하였다.
1985년 9월에는 토론토에서 한국문화영화의 주간행사가 있었으며, 10월에는 사물놀이팀이 캐나다에서 공연하기도 하였다. 1984년 연세대학교 동서문제연구원 내에 ‘캐나디안 스타디스 프로그램(Canadian Studies Programme)’이 발족되어 한 · 캐나다이해교류증진을 위하여 연 4회 정도 캐나다 각계인사의 강연과 세미나를 열고 있다.
역사적으로 캐나다 땅에 맨 처음 발을 디딘 한국사람으로는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된 박에스더(본명 金點童) 부부인데, 그들은 1895년 7월 온테리오주 글렌부엘(Glen Buell)이라는 곳을 다녀간 적이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유학생 제1호는 김일환(1905)인데 큰 성과를 얻지 못하고 뉴욕으로 이주, 사업에 종사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본격적인 한국인 캐나다이주는 1960년 중반 미국 혹은 독일 등 제3국을 경유한 이민이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한국계 캐나다인들은 토론토 · 밴쿠버 · 몬트리올 · 에드먼턴 · 캘거리 등지에 살고 있으며, 가장 집중된 곳은 토론토로서 약 4만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다.
토론토에 사는 한국인의 경우 약 45%가 자기사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11.4%가 기술직, 12.19%가 노동, 사무직이 6.6%, 전문직에 종사하는 수는 9%에 해당한다. 한인들의 수입은 캐나다인 평균수입을 상회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온테리오 한인실업인회는 1,500개 이상의 자영기업인들의 모임으로 막강한 경제인연합회이다.
이민역사가 짧고 언어 · 풍습 등의 차이와 소수민족으로서의 애로가 있어, 교민1세 중 정치적 · 사회적으로 현저한 진출자는 아직 없으나, 1980년대 중반 이후로는 교민2세의 사회진출이 예상된다.
우리나라의 캐나다 이민진출 현황은 매년 증가하여 총 이민자 수의 1.1∼1.5%를 점유한다. 1995년 1월 말 재캐나다교포는 7만 1241명이고, 체류자는 1,791명이다. 2015년 기준으로 캐나다에 약 17만명의 한국교민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주요 교민단체로는 캐나다한인총연합회, 지역별 한인회 17개 지역, 대한체육회 캐나다지부, 재(在)캐나다한인학자회, 올림픽후원회 6개 지역, 캐나다태권도협회 · 한인실업인협회 · 한인신용조합 등이 있다.
2016년 11월 10일부터 캐나다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전자여행허가(eTA)를 승인받아야 한다. 또 전자여행허가를 받기 전 「범죄경력회보」(실효된 형 포함)을 발급받아야 한다. 문제가 되는 범죄기록은 캐나다 이민부에 이민법상 사면을 신청하여 승인을 받아야 비자 발급 시 문제가 없다.
캐나다와 우리나라는 국제정세 분석에 대한 인식을 대체로 같이하고 있다. 그러므로 국제관계에서 캐나다는 우리나라를 계속 지지할 것이며, 북한에 대한 정책에도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캐나다의 아시아 · 태평양 지역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이 지역이 경제적으로 활력에 차 있으며, 급성장의 추세에 있으므로 무역이나 이민 등을 통하여 캐나다의 이익과 번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캐나다 정부는 향후 이 지역을 중요시하는 정책을 계속 추구하게 될 것이다. 특히, 무역과 경제 분야에서 1985년 현대자동차에 의한 승용차조립생산공장의 단독투자 설립계약을 비롯하여, 그 동안 양국간의 교역이 급증하고 있어 앞으로도 경제관계가 깊어질 전망이다.
1980년대에는 캐나다의 대한국 무역역조 폭이 컸다. 1984년의 적자액이 2억 4000만 달러였고, 1985년 상반기에도 2억 1000만 달러를 넘었으므로, 이에 따른 무역역조 시정요구가 계속되었다.
우리나라가 이에 대해 슬기롭게 대처하면서 1990년대 현재 한국의 대캐나다 교역은 대체로 수출 · 수입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1993년을 기준으로 할 때 한국은 캐나다의 세계7위의 교역상대국이며, 캐나다는 한국의 제12위 교역상대국이다.
2015년 기준 캐나다의 대한국 수출은 40.3억 달러, 수입은 78.8억 달러이다. 캐나다의 대한국 주요 수출품은 광물 연료 및 석유, 곡류, 광물, 그리고 육류이다. 캐나다의 주요 수입품은 자동차, 전자 전기기기, 기계류, 그리고 철강이다.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는 501명의 선수단이 참가하였다.
캐나다와 우리나라와의 문화사적 관계는 캐나다 선교사들이 우리 나라를 서방세계에 소개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Corea’라는 말이 캐나다에서 출판된 문헌에 최초로 소개된 것은 토론토대학 내 낙스신학교의 교지(Knox College Monthly)이다. 이 교지에 코리아에 선교사를 보내자는 호소문이 실렸고, 이 호소문에 응한 사람이 게일이다.
게일은 1888년에 토론토대학 문과를 졸업하고 그 해 12월 12일에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게일은 ‘훌륭한 선교자, 학자 또는 저술가’로 불리었고 1912년에 캐나다에서 출판된 인명사전에는 게일을 가리켜 ‘한국을 서방세계에 소개한 가장 으뜸가는 문필가’라고 칭하였다. 게일이 한국에서 은퇴하기까지(1927) 약 40여 년간 번역을 포함한 한국어 저서가 48권에 이르고, 영문 저서도 10여 권이나 된다.
그의 저술로 특기할 만한 것은 『영한사전 English-Korean Dictionary』(1897), 영문소설 「Vanguard」(1904)가 있고, 그 밖에 한국을 서방세계에 소개하는 『Korea in Transition』(1909) · 『Korean Folk Tales』(1913) · 『History of the Korean People』(1926) 등이 있다.
『Pilgrim’s Progress』(천로역정)과 『Robinson Crusoe』(로빈슨크루소)를 한글로 번역하여 서양의 문학작품을 한국에 소개하였고, 『춘향전(春香傳)』 · 『구운몽(九雲夢)』 등을 영역하여 우리 문학을 서방에 소개하였다.
게일은 문화사적 측면에서 한국과 서양을 잇는 교량의 구실을 한 것뿐만 아니라 개화기에 한국의 젊은이들, 가령 이승만(李承晩) · 이상재(李商在) 등에게 독립정신과 민주정신을 고취시키는 데도 핵심적인 구실을 하였다. 캐나다교민들은 1988년 그의 선교10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고향 모교회에 기념동판을 세워 게일의 업적을 새겼다.
게일과 동시대의 사람으로 한국에서 활동하였던 캐나다인으로는 세브란스병원과 세브란스의과대학을 창설하고 언더우드(Underwood,H.G.) 후임으로 연세대학교 2대 총장을 지낸 애비슨(Avison,O.)이 있다(1985년 연세대학교 동문회는 그를 기념하는 석탑을 그의 모교인 토론토대학에 세웠다). 역시 당대인으로 평양에서 맨 먼저 선교사업을 시작한 홀(Hall,W.) 의사가 있으며, 하디(Hardy,R.)와 펜윅도 모두 캐나다 출신들이다.
캐나다인으로서 일본의 침략을 서양에 폭로한 스코필드(Schofield,F.W.)도 잘 알려진 인물이며, 『The Tragedy of Korea』(1908) 또는 『Korea’s Fight for Freedom』 등을 저술한 매켄지는 영국 『Daily Mail』의 특파원으로 러일전쟁이 발발한 1904년 한국을 방문하여 일본의 만행을 『Daily Mail』(London)을 통하여 폭로하였다.
그 해 말 그는 일본에 의하여 추방당하였으나 1906년 다시 내한, 한국 · 만주 및 중국에 뻗친 일본의 제국주의 야심을 『The Unveiled East』(London, 1907)라는 책을 통하여 세계에 폭로하였다.
캐나다에서의 한국학 효시는 1973년에 토론토대학 종교학과에 개설된 한국종교이다. 당시의 책임교수는 맥도널드(McDonald,R.) 박사인데, 그의 양친은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던 맥도널드(McDonald,D.A., 梅道捺)이다. 당시 수강생은 20명이었다고 한다.
그 뒤 토론토대학의 동양학부에서 한국문화사(유재신) · 한국언어(백웅진) · 한국예술(Smith, R. M.)을 강의함으로써 한국학의 기틀을 놓았고, 현재 보강된 3명의 강사와 객원교수가 한국학을 강의하고 있다.
객원교수들은 그들의 전공에 따라 역사 · 문학 · 예술 · 정치 · 사상 등을 강의한다. 현재 학부에서 14과목, 대학원에서 4과목을 강의하고 있으며, 370여 명의 학부생과 4명의 대학원생이 한국학을 연구하고 있다. 15여년 전 약 20여 명의 학생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을 한 셈이다.
이처럼 한국학 발전은 강좌의 확장과 학생수에서뿐 아니라, 토론토대학 동양학부 부장이 한인교수로(백응진) 임명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또한, 토론토대학 내 신학대학원의 한국교회사 강의[유영식(劉永植)]는 캐나다 종교계에 한국을 알리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토론토대학 외에도 맥길대학과 브리티시콜롬비아대학에서도 한국학을 강의하고 있다.
토론토대학 한국학과는 1979년 토론토에 거주하는 교민들로 토론토대학 한국학과 후원재단을 구성하여 본국 학술진흥재단과 협력하여 한국학을 경제적으로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멀지 않은 장래에 한국학은 동아시아과의 중국학과 일본학과와 더불어 질적 · 양적으로 평준화되어 동양삼국 연구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캐나다에서의 한국학 활동은 캐나다 아시아학회를 통하여 활발히 진행되고, 한국학 학자들은 국내 및 국제학회에 참여한다. 1988년 제6차 국제한국언어학회가 토론토대학에서 열렸고, 발표된 논문들은 『Papers From the Sixth International Conference on Korean Linguistics』(1988)라는 제하에 출판되었다.
한국학 관계의 출판물을 간략해 보면, 『Modern Korean Syntax』 · 『Korean and Asian Religious Tradition』 · 『Shamanism:The Spirit World of Korea』 · 『Introduction of Buddhism to Korea』 · 『Earlier Canadian Missionaries in Korea:A Study in History 1888∼1895』 등이 있다.
캐나다는 ‘바다와 바다(A Mari Usque Ad Marie)’, 즉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천연적 수평문화의 나라이다. 이 수평선적 문화 위에 수직적으로 유입된 각 이민족의 문화를 이식하여 모자이크문화를 창조하려는 정책이 미국적 정책(melting pot)과 다른 캐나다의 복합문화정책이다. 그래서 정부는 정책적으로 각 민족의 고유한 문화를 보유하고 사회에 보급하도록 권장한다.
토론토의 경우 매년 열리는 각 민족의 향연인 카라반(caravan)행사에 이곳 한인들은 서울시를 꾸며 본국의 문화예술단체를 초빙하기도 하고, 주민들 자체로 한국의 전통문화를 소개한다.
약 30여 년의 짧은 이민역사에 비추어 교민들의 문화적 활동은 활발하다. 1965년 12월에 발족한 토론토한인회는 초기에는 교민들의 영사 업무를 비롯, 이민정보 · 문화행사의 대명사 노릇을 하였다.
낙스장로교회의 당회록에 의하면 종교라는 이름 아래 최초의 교민집단을 형성한 것은 1967년이고, 현재 토론토지역에는 100여 개의 개신교교회와 2개의 천주교성당과 3개의 사찰이 있어, 교민의 종교생활을 돌보고 있다.
언론이 교민사회에 끼친 기여와 영향은 자못 크다. 『한가주보(Korea Canada Times)』라는 제하에 교민 최초의 신문이 1971년 3월 26일 창간호(당시 주간지)를 발간하여 약 1년 남짓 계속되다가 재정난으로 폐간되었다. 그 뒤 얼마 동안 교민을 위한 신문이 없다가 1971년 시카고판 『한국일보』가 보급되었다.
1972년 11월 29일 『Korean Journal』을 발간하였고, 연이어 1973년 10월 24일 『New Korea Times』, 1979년 2월 23일 『민중신문』, 1981년 6월 『한국일보』(Canada Newsrk가 폐간되고 한국일보 발행), 1984년 1월 1일 『동아일보』, 1984년 11월 8일 『Korean Digest』, 1987년 4월 15일 『Canada 조선』 등이 발간되었다.
토론토교민들로 구성된 한인장학재단은 장학사업을 활발히 추진하고 있다. 미국과 캐나다의 대학과 대학원에 재학하고 있는 선발된 한인과 그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줄 뿐 아니라, 한국의 고등학생들을 선발하여 매년 장학금을 지불하고 있다.
또한, 이 장학회는 매년 비한국계 2명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줄 뿐 아니라, 신체장애자 1명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수여하며, 토론토대학 한국학과에서 수학하는 한국학 연구생 중 우수생 2명을 추천받아 장학금을 지불한다. 현재까지 장학금으로 수여한 금액은 80여만 달러에 달한다.
1977년에 발족한 재캐나다문인협회는 아동문학작가인 이석현을 중심으로 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개인작품은 물론, 동인지 『이민문학』(1979) · 『이민도시』(1980) 등을 출판한 바 있다. 협회원뿐 아니라 일반 교민들을 위한 창작 임상강의를 주관하기도 하고, 정기동인발표회도 갖는다.
교민들로 구성된 한인합창단(1979.9.)은 매년 성탄절을 기하여 헨델(H○ndel, G. F.)의 「메시아」를 공연하며, 한인들로 구성된 한인교향악단(1980.8.)은 국내 혹은 국외에서 활약하는 한인 음악인들을 초청, 연주회를 가짐으로써 한국음악예술을 서방에 전하는 창구의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한인들로 구성된 재 캐나다미술인협회가 있어 예술활동을 계속하고 있으며, 한인들만의 극단 ‘얼’이 1982년 9월 창단되어 매년 우리의 극을 공연하고 있다. 대표적인 공연으로 「맹진사댁경사」(1983) · 「이수일과 심순애」(1985) · 「방자전」(1990) 등이 있다.
캐나다의 박물관과 미술관의 한국유물 소장으로는 매크레가 죽은 뒤 소장하고 있던 것을 그가 그의 딸 헬렌(Helen)이 오타와국립박물관에 기증한 얼마간의 유물이 있다. 토론토에 있는 유명한 온테리오왕립박물관에는 고려청자, 조선백자, 한국 구석기 · 청동기시대의 돌도끼 등 희귀한 문화유산이 소장되어 있다.
이 중 상당 부분은 맥도널드라는 선교사가 주로 평안도지역에서 수집하였던 것을 그의 아들 맥도널드가 소장하고 있다가 그가 죽자 그의 미망인이 왕립박물관에 기증한 것들이다.
왕립박물관은 한국문화소개 전시회를 3년에 걸쳐 캐나다 전역을 돌며 가진 바 있다. 특히, 1984년에는 재캐나다한인들로 한국문화예술진흥협회가 조직되어 온테리오왕립박물관에 한국전시관을 설립하고, 우리 문화유산을 수집, 보유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1981년 각계각층의 교민들로 구성된 한인상위원회는 한인사회에 공로 · 문화 · 예술 · 봉사 또는 학술면에서 기여한 자랑스러운 한인 및 서양인을 선정해 매년 표창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