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일제강점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서 평양 장로교계 3·1운동을 주동했던 목사.
인적사항
주요 활동
김선두는 1919년 3월 1일 숭덕학교(崇德學校) 교정에서 열린 평양 장로교 계열의 광무황제 봉도식과 독립 선언식에서 사회를 맡았다. 사회자로서 그는 봉도식 축복 기도를 마친 후 성서 베드로전서 3장 13~17절, 로마서 9장 3절을 봉독한 후, “구속되어 천년을 살기보다는 자유를 얻어 100년을 살아가는 것이 낫다.”라는 내용의 연설을 하여 군중을 열광시켰다. 이 일로 인해 김선두는 3월 2일 새벽에 만세 시위 주동자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1919년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김선두는 즉시 불복 항소하였으나, 9월 경성복심법원에서 1년 2개월을 선고받았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당시 장로회 총회는 매해 9월 초순경에 개최되었으나 1919년에는 3·1운동 여파로 한 달이나 늦은 10월 4일에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열렸다. 총회장인 김선두 목사가 복역 중이었으므로 부회장인 마펫[麻布三悅] 선교사가 회의를 주재하였다. 김선두는 1920년 4월 30일 만기로 출소하여 목회 활동을 계속하면서 장로회신학교 강사로도 출강하였다. 1924부터 1933년까지는 평양 신암교회를 담임하였고, 1926~1928년에는 선천 신성중학교 교장을 겸했다. 이후 1930년에는 평양노회장에 재선되었고, 1933부터 1937년까지는 함경북도 성진(城津)의 욱정교회를 담임하였다.
김선두는 1938년 8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를 앞두고 일본 기독교계의 협조를 얻어 신사참배 결의를 저지시키고자, 일본 유학생으로 있다가 잠시 귀국한 김두영(金斗英)과 일본으로 건너갔다. 궁내부' 대신 · 제국 회의 의원 · 일본 육군 대장 등을 찾아가 한국교회가 당면한 어려운 입장을 호소하고 그들과 함께 돌아와 미나미 지로[南次郞] 조선 총독을 면담한 결과 총회가 거부하면 신사참배를 더 이상 강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것을 총대들에게 알리기 위해 총회가 개최되던 평양으로 가던 중 열차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개성경찰서에 수감되어 무산되었다. 경찰서에서 석방된 후 곧 만주로 망명하여 봉천신학교(奉天神學校)에서 박형룡(朴亨龍) · 박윤선(朴允善) 등과 함께 신학교육에 전념하였다.
김선두는 광복 후 1946년 월남하였으나, 지병으로 1949년 10월 14일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김선두의 장례는 10월 17일 신도연합회 주최로 치러졌으며, 망우리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원전
-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8.21., 경성복심법원 1919.9.19., 고등법원 1919.10. 20.)
-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록』 (1919, 1938)
단행본
- 『숭실교우회 회원명부』 (대성사, 1938)
- 『희년기념 목사 대설교집』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 1935)
논문
- 김승태, 「평양에서의 3·1운동과 김선두 목사」 (『기독교사상』 713, 대한기독교서회, 2018)
기타 자료
- 「서울의 고김선두 목사의 추도회」 (『신한민보』, 1949. 10. 27.)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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