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대동 출신. 27세 때 평양 숭실중학에 입학하고, 이어서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평양신학교에 진학하여 1913년에 졸업하였다. 신학교를 졸업한 지 5년 만인 191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7대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목사가 된 뒤 처음으로 목회한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약 10년간 목회를 한 뒤 신암교회(新巖敎會)로 전임하였다.
교회생활 중에서도 숭실중학과 숭실전문학교에서 성경과목을 교수하였고, 1924년부터는 평양신학교에서 성경강사로 신학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1926년 선천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에 성경담당교사로 부임하여 당시 교장이었던 미국인 선교사 함가륜(咸嘉倫, Hoffman, C.)을 보좌하여 대리 시무를 하였다. 그 뒤 함경북도성진교회(城津敎會)에서 수년간 목회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평양을 중심으로 거사의 주동적 구실을 하여 투옥을 당하였다. 그의 민족주의사상은 역사적 프로테스탄트 신앙과 결부되어 그의 활동에 반영되었다.
1938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차 총회를 앞두고 일제의 탄압을 받자 그는 일본 기독교계의 협조를 얻어 탄압을 저지시키려고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궁내부대신·국회의원·일본육군대장 등을 찾아가 한국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어려운 입장을 호소하였다. 일본의 기독교인들로부터 협조의 언약을 받고 평양으로 돌아오는 열차에서 체포되어 개성경찰서에 수감되었다.
경찰서에서 석방되자 곧 만주로 망명하여 만주신학원(滿洲神學院), 즉 봉천신학교(奉天神學校)에서 박형룡(朴亨龍)·박윤선(朴允善) 등과 같이 신학교육에 전념하였다. 광복 후 만주에서 돌아와 월남하였다. 이후 지병으로 1949년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