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선교사들이 초교파적으로 선교현장에 대한 정보를 교환할 목적으로 발간하였다. 선교사들이 주요 필자로 한국교회의 상황을 비롯하여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전반에 걸쳐 기고한 글로 편집되어 있다. 이 잡지가 창간되기 전에도 동일한 목적의 영문 잡지들이 있었다. 1892년 1월 창간되어 1898년 4월까지 간행된 The Korean Repository와 1901년 1월부터 1906년 6월까지 간행된 The Korea Review가 그것이다. 이 두 잡지는 모두 월간으로 간행되었으며, 주로 한국의 언어와 역사, 문화 등을 다루었다. 즉 한국학 연구지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감리교에서는 1897년 2월 순한글로 『조선그리스도인회보』를 주간으로 발간하고, 이어 1897년 4월 장로교에서도 역시 순한글로 『그리스도신문』을 주간으로 간행하여 한국인 기독교인들 간에 선교현장의 정보를 교환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정작 한글에 어두운 선교사들 사이에는 선교현장의 정보를 교환할 매체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이에 장로교와 감리교에서 각각 영문 잡지를 발간하였다. 북장로교 선교사 빈튼(C. C. Vinton)은 1901년 11월 The Korea Field를 창간하여 계간으로 발간하였다. 빈튼은 미국북장로회, 미국남장로회, 캐나다장로회, 호주장로회 선교부 소속 선교사들의 활동 보고서를 정리하여 선교사들 사이에 정보교환이 가능하도록 편집, 발행하였다. 반면 북감리회와 남감리회는 하보(S. B. Harbaugh)와 베크(S. A. Beck) 선교사가 주도하여 1904년 11월 The Korea Methodist를 월간으로 간행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장로교와 감리교가 각각 영문 잡지를 발간했는데, 1905년 9월 ‘재한복음주의선교부연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가 형성되어 선교지역 분할 및 공동 선교를 위해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부가 협력하게 됨으로써 영문 잡지의 통합도 논의하게 되었다. 그 결과 The Korea Methodist는 1905년 10월호, The Korea Field는 1905년 8월호를 끝으로 폐간하고, 1905년 11월 통합된 기관지로서 The Korea Mission Field를 창간하게 된 것이다.
The Korea Mission Field의 주된 독자는 선교현장의 선교사들이었지만, 이 월간지는 본국의 후원자들에게도 한국선교의 상황과 선교사들의 노고를 알리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잡지는 장로교와 감리교를 총 망라하여 한국에서 이루어진 전체 선교사업을 수록할 것”이라고 창간사에서 밝히고 있다. 나아가 “본국 교회에 있는 우리의 동지 및 협력자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받게 되리라 기대”하였다.
연평균 12,000부가 발행되었고, 정기구독자가 1천 명 정도로 한국 내 선교사들 사이에서 그 영향력은 막강하였다. 특히 선교 현장에 대해 선교사들 스스로 기록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1차 사료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또한 한글 주간신문과 영문 월간잡지를 합하여 그 정보를 종합하면 당시 한국의 선교 상황과 교회성장의 전모를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