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출신. 1908년 이명헌(李明憲) 등과 함께 동양선교회에 가담하여 동양선교회가 운영하는 동경성서학원에서 수학한 뒤 귀국, 1911년 경기도 용인의 장평리교회 에서 원세성(元世性) 등과 함께 농촌선교에 힘썼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승훈(李昇薰)·함태영(咸台永) 등과 만세운동을 모의하고 경기도 및 충청지구 연락책임자로 활약하였다. 3·1운동 직후에는 이상재(李商在) 등과 제2의 만세운동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곧, 만주 용정(龍井)으로 건너가 교원·전도사·기자로 활동하면서 교포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21년 귀국하여 이상재·윤치호(尹致昊)·박승봉(朴勝鳳) 등이 일으킨 기독교창문사 창립운동에 가담하였다.
1921년에 장로가 되었고, 1925년에는 신학교를 졸업하지 않았음에도 특별가결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27년부터 경기 노회장·신간회 안성지부장·예수회연합공의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32년에는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의 신흥우(申興雨)를 중심으로 한 적극 신앙단에도 참여하였고, 경기 노회원 중에서 비서북계(非西北系)가 중심이 된 경중노회(京中老會) 창설에 주도적인 구실을 하였다.
신사참배반대운동을 벌이다가 1939∼1942년에 걸쳐 옥고를 치렀으며, 광복 이후에는 과도정부 입법위원·기독신민회 초대회장으로 활약하였다.
1953년 예수교장로회에서 기독교장로회가 분립될 때 기독교장로회 총회장과 한국신학대학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