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도 ()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박희도 전후면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박희도 전후면
인물
일제강점기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잡지 『신생활』을 발간하고, 신간회에서 활동하였으나, 전향하여 일제 정책에 협력한 개신교인 · 언론인 · 독립운동가 · 친일반민족행위자.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9년(고종 26) 8월 11일
사망 연도
1952년 9월 25일
출생지
황해도 해주
관련 사건
3·1운동|신생활필화사건
내용 요약

박희도는 일제강점기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1889년(고종 26)에 출생하여 1952년 사망했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문에 서명하였다가 체포되어 약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2년 러시아혁명 기념으로 발간한 『신생활』11호가 빌미가 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34년 11월 조선인과 일본인들의 일선융합(日鮮融合)을 표방하며 시중회 이사로 활동하였다. 1936년 11월에는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 실시를 촉구하였다. 1939년 1월 ‘내선일체’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동양지광』을 발행하였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잡지 『신생활』을 발간하고, 신간회에서 활동하였으나, 전향하여 일제 정책에 협력한 개신교인 · 언론인 · 독립운동가 ·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황해도 해주 출신. 계근(桂根)의 아들이다.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생애 및 활동사항

1889년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하였다. 17세까지 한문을 배우고 황해도 해주 의창학교(懿唱學校) 보통과와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이어 평양 숭실중학교로 진학하여 학업을 마친 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2년 수학하고 중퇴하였다. 이후 협성신학교(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5세 무렵 기독교인이 되었고, 일찍이 해주군 교회의 전도사로 활동하면서 1916년에는 중앙예배당에서 ‘지성의 감동력’이라는 주제로 여러 차례 강연을 하였다. 같은 해 8월 미국인 목사 베커(Becker, A. L.,白雅德)의 지도 감독으로 경성에서 유학하는 해주 출신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 건립을 추진하였다.

1916년 6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오늘의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 약칭 YMCA)의 회원 확대 운동에 가담하여 크게 활약하였고, 함흥 소재 기독교계 보통학교인 영신학교(永信學校)의 교감으로 재직하였다. 1916년 10월 장낙도 · 유양호 등 중앙교회 목사와 함께 중류이하 자제를 대상으로 하여 기독교적 민족교육을 표방한 중앙유치원을 설립하였다. 1918년 6월 감리교 창의문밖 교회 전도사가 되었고, 9월 조선기독교청년회 회원부 간사로 취임하였다. 1919년 2월 22일 손병희 · 최남선 · 이승훈 등이 한국의 독립을 내외에 선언하기로 결의하자 기독교 민족주의 청년운동의 일환으로 참여를 결정하였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문에 서명하였다가 체포되어 약 3년간 주1를 치렀다.

1921년 12월 출옥한 후 고양군 숭인면 용두리 교회 주임으로 근무하면서 1922년 1월 김명식 등이 주도한 신생활사 창립에 참여하였다. 신생활사에 자본금 1만 5천원을 기탁하여 사장으로 취임하고 잡지 『신생활』 발간을 이끌었다. 기독교 세력과 초기 사회주의 세력의 연합적 성격을 지닌 잡지 『신생활』은 사회주의사상을 비롯한 여타 신사상을 소개하고 전파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해 11월 ‘신생활필화사건’으로 구속되어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신생활』 11호가 러시아혁명 5주년 기념호로 발행된 것이 빌미가 되었고, 이로 인해 잡지는 발행금지 처분을 당하였다.

1924년 말 출옥한 뒤 독립계몽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하였다. 1925년 3월 도덕적 인격수양과 경제적 실력양성을 표방하며 조직된 흥업구락부 결성에 참여하였고, 1927년 1월 신간회 창립에 참여하였다. 1929년 7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내 출판부장을 지냈고, 같은 시기 신간회 동경지회 간부(대표회원)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9월 동회(同會) 회보 편집위원을 담당하였으며, 10월 중앙상무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28년 9월 중앙보육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1930년 조선고아구제회 이사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 사회운동에 참여하면서 여러 잡지에 계몽적 성격의 글을 다수 발표하였다. 교육과 사회운동에 종사하다가 1934년 사생활과 관련된 스캔들에 휘말려 교장직에서 사퇴하였다.

이후 1930년대 중반경부터 전향하여 일제 정책에 적극 협력하기 시작하였다. 1934년 11월 친일 조선인과 일본인들이 일선융합(日鮮融合)을 표방하며 조직한 시중회(時中會)의 발기인 및 이사로 1937년 10월까지 활동하였다. 1936년 11월에는 ‘조선인 징병제도 실시요망’ 준비위원에 참여하여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 실시를 촉구하였다. 이후 1942년 5월 징병제가 실시되자 이를 환영하고 감격해하는 감사장을 일본 내각총리, 육해군 대신, 조선 총독, 조선군사령관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1938년 9월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역임하였고, 1939년 1월 주2’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동양지광사를 창설하여 기관지 『동양지광』을 발행하였다. 1945년 5월 폐간할 때까지 동 잡지사의 사장,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1939년 5월부터 1944년 6월까지 전쟁협력 외곽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사로 활동하였다.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의 평의원으로 활동하였고, 1945년 6월 조선언론보국회의 참여로 활동하였다. 이밖에 1937년 9월부터 지방 순회 좌담회와 강연회 등에 참가하여 주3, 지원병, 학병, 헌납 권장 등을 역설하였다. 이같은 친일 행적으로 인해 1949년 2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조사받았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자료집 5: 삼일운동 재판기록』
『매일신보(每日申報)』
『왜정시대인물자료(倭政時代人物史料)』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7(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일제하 한국기독교민족주의 연구』(장규식, 혜안, 2001)
『한국 기독교청년회 운동사』(전택부, 정음사, 1978)
『한국 기독교사 연구』(김양선, 기독교문화사, 1971)
「『신생활』의 사회주의 담론과 문예의 특성」(김종현, 『인문논총』 32, 2013)
「1920·30년대 한국기독교인의 민족운동 연구」(김권정, 숭실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1)
주석
주1

옥살이를 하는 고생. 우리말샘

주2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뜻으로,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조선인의 정신을 말살하고 조선을 착취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구호. 우리말샘

주3

‘황국 신민화’를 줄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집필자
이병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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