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호부터는 월간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순간으로 간행하였다. 3·1운동 때 민족대표의 한 사람이었던 박희도(朴熙道)가 미국인 선교사 베커(Beker, 白熙德)를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하여 창간하였다.
박희도는 황해도 해주의 이승준(李承駿) 등의 출자로 무산대중의 개조와 혁신이라는 기치 아래 신생활사를 설립하였다.
창간호가 나오자 곧 발매금지가 되었으며, 1922년 11월 14일자 제11호에서 특집으로 발간한 ‘노국(露國)혁명5주년기념호’가 다시 발매금지되었다.
이때 사장 박희도 및 인쇄인 노기정(盧基禎) 두 사람이 구속되었고 인쇄기도 봉인되어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뒤 주필 이하 다수의 집필자가 검거, 기소되어 1923년 1월 8일 전원 2년 6월 내지 1년 6월의 징역이 선고되었는데 이것은 우리 나라 최초의 사회주의관계 재판이었다.
당시 문제가 된 논문은 김명식(金明植)의 <러시아혁명기념>, 유진희(劉鎭熙)의 <민족운동과 무산계급의 전술>, 이항발(李恒發)의 <자유노동조합결성의 취지>등이었다.
같은 날 우리 나라 최초의 사회주의 잡지인 ≪신생활≫은 발행금지의 처분을 당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