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은 신채호(申采浩)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한 해에 임시정부 소재지인 상해에 『독립신문』과 더불어 두 개의 언론기관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 논조가 서로 엇갈릴 경우가 많아, 마치 대립된 것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독립신문』은 이승만(李承晩)을 옹호하는 논조를 편 데 대하여 『신대한』은 이승만을 공격하고 정치적 논쟁을 폈다. 1920년 1월 4일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는 신년 연회를 겸하여 전기 두 신문사 기자들을 초대하여 자리를 같이하였다.
이때 『신대한』측은 편집장 김두봉(金枓奉) 등 10명, 『독립신문』측에서는 사장 이광수(李光洙) 등 8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무총리는 두 신문의 공적을 찬양한 다음 “서로 협조하여 우리 독립운동사업에 대해 동일한 보조를 바란다.”라는 요지의 당부를 하였다.
『신대한』의 유력한 논객으로는 신채호가 있어 그 무게를 더하였으며, 북경의 박용만(朴容萬) 및 신대한동맹 등과 긴밀한 연락관계를 가지고 있어 비판성이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