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북감리회의 아펜젤러 선교사가 정동제일교회에 이어 1890년 서울에 세운 두 번째 교회이다.
한국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는 1885년 내한한 후 1886년 배재학당을 설립하여, 교육 사업에 착수하는 한편 1887년 남대문안 작은 한옥에서 한국인을 위한 첫 공중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한국감리교회의 모교회인 정동제일교회의 태동이다. 1888년의 영아소동으로 선교활동이 일시 중단되는 위기를 극복한 아펜젤러는 1889년 육의전이 즐비한 종로 한복판에 교회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반기독교 분위기를 고려하여 한국인들이 복음에 접촉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자 1890년 정월에 서점을 열었다. 종로서점에서는 성경, 찬송을 비롯하여 기독교 서적과 신학문 관련 서적들을 판매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점을 개방하여 책을 살 수 없는 이들이 자유롭게 열람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종로서점을 통해 교회개척의 기반을 닦은 아펜젤러는 1890년 가을 종로에 마련한 한옥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중앙감리교회의 시작이다.
처음 예배처는 종로서점 길 건너편 골목 안쪽에 자리 잡았으나, 1891년 봄 예배처를 대로변의 종로서점으로 이전하였다. 종로서점은 1894년 대동서시(大東書市)로 새롭게 개장하였는데, 이때 최병헌이 대동서시의 운영을 맡게 되었다. 최병헌은 1888년 10월 존스(G. H. Jones) 선교사의 한글 선생이 되면서 기독교를 접하게 되고 이듬해 존스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배재학당 한문교사로 활동하였는데 이후 목회와 연구에 몰두하여 한국 최초의 신학자로 불리게 된 인물이다. 그러나 최병헌이 정부 관리가 되어 대동서시를 떠나게 되고, 아펜젤러의 분주함으로 종로의 집회는 침체되었는데, 결국 1902년 아펜젤러가 불의의 선박 충돌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교인들은 정동교회의 집회에 참석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종로의 집회는 부침을 거듭하다가 1910년 이경직 전도사 부임 이후 급속한 성장을 이루며 종로 구역 종로교회(초기부터 종로교회, 중앙교회, 종로중앙교회 등으로 불리다가 1930년 중앙교회로 공식 확정됨)로 발전하였다. 1916년에는 ‘중앙유치원’을 세웠는데 한국인이 주도한 한국 근대 유치원 교육의 모델이 되었다. 장낙도 목사와 박희도 전도사의 지도 아래 교회재정으로 설립되었고, 한국인 보모들이 교사로 참여하였다. 중앙유치원은 중앙유치원 사범과의 설립, 중앙보육학교로의 발전을 바탕으로 중앙대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1919년 3·1운동에는 정동교회, 종교교회와 함께 중앙교회의 담임 김창준 전도사와 유치원장을 맡았던 박희도 전도사가 민족대표로 서명하여 옥고를 치렀다. 1920∼30년대 김창준 목사와 김영섭 목사가 번갈아 시무하며 중앙교회는 큰 발전을 이루었다. 미감리회는 1923년 동양선교 75주년을 기리며 중앙교회에 기념예배당을 설립할 계획을 세웠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만 1931년 중앙교회는 연와석조(煉瓦石造) 60평 규모의 예배당 ‘증축 봉헌식’을 거행하는데 그쳤다. 일제말기에는 일제의 탄압에 의해 많은 교회가 폐쇄될 때 중앙교회는 폐쇄된 상동교회를 인수하는 고통을 감수하기도 했다. 해방 후 교단의 분열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중앙교회는 한국 감리교회의 중심교회로 성장하였다.
1975년부터 4차례에 걸쳐 허가가 지연되었던 예배당 건축 문제가 1979년 말 ‘공평지구 재개발사업 제6지구’로 확정 고시되면서 해결되었다. 1982년 성탄절을 맞아 새 성전으로 하나로 빌딩을 봉헌했다. 1983년 3월 준공검사를 마친 하나로 빌딩은 지하 3층, 지상 12층, 옥탑 3층 연건평 6,200평의 최신식 설비가 갖추어진 현대식 빌딩이었다. 지하 1층에는 대형 아케이드를 개설하여 90개의 점포와 식당들이 입주했다. 도심지의 빌딩식 교회로 다시 출발한 중앙교회는 1990년 창립 100주년을 맞아 필리핀, 태국 선교를 시작하여 교회를 개척하고 학교를 세우며 복음전도와 사회계몽에 힘쓰고 있다. 21세기의 문턱에서 중국 선교를 시작하여 2010년 중앙교회 창립 120주년을 맞아 ‘하나로 한중교회’를 창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