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신문』은 국·한·일문을 혼용하여 창간호부터 8면으로 발행되었으며, 1943년 5월부터는 6면, 4면 또는 2면 등 지면수를 달리하며 발행되었다. 편집인은 감리교 목사 박본연서(朴本淵瑞), 발행인은 장로교 목사 덕천인과(德川仁果), 발행소는 기독교신문협회였다. 일제 당국은 전시체제하에서 한국기독교에 대한 통제가 용이하도록 각 교단에서 발행하는 기관지를 통폐합하였다. 이로써 감리교의 『감리회보』, 장로교의 『장로회보』, 구세군의 『구세신문』, 성결교의 『활천(活泉)』이 모두 폐간되었고, 1942년 4월 29일 일본의 천장절(天長節: 일왕의 생일)에 맞추어 ‘기독교신문(基督敎新聞)’ 제호의 창간호가 발행된 것이다.
신문 창간사에서 기독교신문협회장 덕천인과(정인과)는 “본보는 반도 기독교의 일본적 진전에 기여하려고 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취지 하에 본보는 반도 기독교 내 국민총력운동의 강화, 각 교파 간 돈목(敦睦)의 기도와 각 파간의 연계합동의 추진, 건전한 신앙의 발달과 교화기능의 증진, 종교의 국민정신 작흥과 국민사상 계도, 상의하달(上意下達)과 하정상통(下情上通)의 원활, 필승체제 확립에 관한 계도, 내선일체의 완성과 국어생활의 철저, 국민개로(皆勞), 부인계발, 교내(敎內) 여론의 통일 지도 등 강령을 실행하려 한다.”고 창간 취지를 밝혔다. 그 취지에 따라 『기독교신문』에는 일본 천황의 조서, 조선총독의 유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실천사항, 친일화된 교단 지도자들의 지시 등이 많이 게재되었다. 한편 주일공과,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창립30주년 기념 조선기독교사료전람회에 전시할 사료 목록(8회 연재), “일본적 기독교 건설의 과제 앞에 기독교 신학계의 주류 사조를 소개함이 필요하다.”는 전제 하에 “빨트 신학에 대한 중심문제”(10회 연재), 김은우의 논문 “빨트의 기독교논리학”(9회 연재) 등이 실려 있다.
당시로서는 드문 장편 종교소설 장본시화(張本時華)의 ‘동방’(東方)이 1942년 11월 4일부터 1943년 8월 18일까지 모두 28회 연재되었다. 연재를 시작하기에 앞서 작가는 “전선(戰線)과 총후(銃後)에 얼기설기 얼크러진 넓은 무대에서 많은 등장인물들이 힘 있게 일어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건설하는 것을 이곳에서 찾아보기로 하자.”며, 일본·중국·한국의 세 간호사가 전쟁터에 나가 ‘순애’(純愛)로써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힘써 일하는 것을 그려가겠다고 언명하였다.
이 신문에는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일제 말기 한국기독교의 존재 양상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