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보』의 모체는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에서 발행한 월간지 『종교시보(宗敎時報)』이다. 종교교육부 1대 총무를 맡아 『교회교육(敎會敎育)』을 발행해온 리석락 목사가 만주로 이주한 한국인들을 위한 목회를 위해 봉천교회 주재목사로 부임하자, 그 후임으로 정인과 목사가 2대 총무를 맡게 되었다. 정인과는 그동안 ‘교회교육’이란 제호 때문에 잡지의 내용이 제한되는 경향이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제호를 ‘종교시보’로 바꾸고, “종교교육운동에 대한 본부의 소식과 전국적 또는 외국서 되는 소식이라도 자세히 전하여 전국적으로 본 종교운동에 대한 통일의 힘을 모으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밝혔다.
1932년 12월 1일자 창간호로 시작된 『종교시보』는 1936년 1월 14일자, 제38호(제5권 1호)까지 발행된 이후에 주간으로 바뀌었다. 정인과는 “주간이 아니고서는 삼천 교회에서 쏟아지는 소식을 報하여 교회통신의 任을 다할 수 없고 삼천 교역자의 목회상 각 방면 사업에 지도의 責을 다할 수 없으며 삼십만 신도의 영적 양식을 대일수가 없음을 더욱 절감하고 닥쳐오는 여러 가지 내외 정세는 우리의 공동한 신앙과 의견을 발표하고 우리 전체적 이목이 될 기관이 하루빨리 출현할 필요를 느껴” 주간 발행에 나서게 되었음을 피력하였다.
주간으로 바뀌면서 제호도 ‘종교시보’에서 ‘기독교보’로 바뀌었다. 1936년 1월 21일자 『기독교보』 첫 호를 제5권 2호로 명시한데서 이전의 『종교시보』와의 연속성을 드러내고 있다. 『기독교보』 첫 호에 실린 “3부 합동 주간 발행에 際하야 형제자매에게”란 글을 보면 그동안 조선장로교 총회안의 종교교육부, 농촌부, 면려부(勉勵部)는 『종교시보』, 『농촌통신』, 『면려회보』 등을 각각 정기적으로 간행해왔는데 세 부서가 합동하여 하나의 기관지를 발행하기로 한 것이며, “기독교의 진리를 선포하고 그 신앙을 옹호하며 아울러 전 조선기독교계의 보도기관이 되기를 期하는 의미에서”, ‘기독교보’라 호명한 것을 알 수 있다. 편집인은 정인과(鄭仁果), 발행인은 허대전(許大殿, J. G. Holdcroft)으로 이전과 같았다.
『기독교보』가 간행되던 시기는 일제가 전시체제 속에서 한국에서의 정신적 물질적 수탈을 극대화하며 일제의 통제가 용이하도록 한국기독교의 체제마저 개편하려던 때였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교회의 간행물에도 영향을 미쳤다. 1938년 8월 교파연합지인 『기독신문』(基督新聞) 창간을 앞두고, 1938년 7월 19일 제 169호로 『기독교보』는 폐간되었다. 『기독신문』 창간호에는 “동양영원의 평화를 위하여 공헌하라.”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의 축사가 실리는가 하면, 첫 면에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가 실리기 시작하였다. 이제 『기독신문』은 일제 말기 전시체제하에서 친일적인 초교파기독교 기관지가 된 것이다.
〔참고문헌〕
『基督新聞』(1938.8.16.)
『基督敎報』(1936.1.21.∼1938.7.19.)
『宗敎時報』(1936.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