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북감리회의 스크랜턴 선교사가 세운 애오개 시약소를 모체로 하여 발전한 교회이다. 1885년 내한한 북감리회의 첫 의료선교사 스크랜턴(W. B. Scranton)은 복음전도가 금지되어 있는 상황에서 정동에 ‘시병원’을 개설하여 환자들을 진료하였다. 정동을 중심으로 의료활동을 벌이던 스크랜턴은 가난하고 소외된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정동 밖으로 나가 애오개, 동대문 그리고 남대문 시장 등에 진료소를 분산하여 설립할 계획을 세우고, 애오개에서 가정 먼저 의료활동을 개시하였다. 스크랜턴은 1888년 12월 애오개 언덕의 한옥에 ‘애오개 시약소’를 열었는데, 서대문 밖 애오개는 어린아이들과 무연고자의 무덤이 많았고, 전염병 환자 진료소인 활인서(活人署)가 있던 곳으로 가난하고 병든 민중을 위한 병원을 개설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학교와 병원사업은 궁극적으로 기독교 선교에 목적을 두었기 때문에 언제나 복음전도가 병행되었다. 바로 이 애오개 시약소가 이후 아현교회로 발전하였다.
애오개 시약소는 인력 부족으로 문을 연지 10개월 만에 문을 닫았지만, 스크랜턴의 어머니이자 이화학당을 설립하고 여성교육에 앞장선 스크랜턴 대부인(M. F. Scranton)이 애오개에서 부인과 어린이를 대상으로 전도활동을 이어갔다. 1891년부터 올링거(F. Ohlinger) 선교사가 애오개 선교를 맡아 시약소 건물에서 집회를 시작하였고, 1893년 9월부터 노블(W. A. Noble) 선교사 부부가 올링거의 뒤를 이어 애오개 선교를 담당했다. 노블 부부가 애오개 선교를 맡으면서 교회의 안정적 성장이 이루어져 교인이 많을 때는 100여 명이었다. 노블 부인은 문맹의 여성과 아이들에게 기독교 교리와 한글을 가르쳤다. 노블 부부의 애오개 선교는 활기를 띠었으나 청일전쟁으로 교인이 흩어지고 인근 천주교인과의 분쟁이 일어나면서 위축되었다. 거기에 노블 부인이 건강 문제로 일시 귀국하게 되자 애오개 집회는 침체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여성 교인들의 요청으로 1897년 애오개에 매일학교가 개설되면서 복음 선교도 되살아났고, 매일학교는 아현여학교를 거쳐 아현여자보통학교로 발전하였다.
아현교회는 1909년 마포·공덕·창천·서강교회 등과 함께 ‘서문 밖’ 구역에 소속하게 되었다. 현순 목사가 서문 밖 구역의 담임자로 파송된 이후 30년 동안 아현교회는 이들 서대문밖의 교회들과 ‘합구역’ 형태로 목회자 파송을 받았다. 현순에 이어 오태주, 윤성렬, 최상현, 한석원, 최학규 목사가 아현교회에서 목회하였다.
1925년에는 미국에서 보내온 선교헌금으로 이전의 ‘ㄱ’자 한옥 예배당을 허물고, 60평 규모의 벽돌예배당을 지었다. 1930년대 서울시의 도로계획에 따라 예배당을 다시 옮겨지었다. 1938년 아현교회는 재정자립을 이룩하고 처음으로 독립구역(아현구역)이 되어 교회 단독으로 목회자를 맞이하는 기쁨을 누렸지만, 일제 말기 한국의 다른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총독부의 시책에 따라 애국반 조직, 애국헌금 납부 등의 고통을 겪었다.
해방 후 1954년 총회에서 교단이 분열되어 한국감리교회는 혼란과 갈등을 겪게 되었는데 이 와중에 아현교회도 분열되었다. 1956년 김성렬 목사가 별도로 아현중앙교회를 세워 분립해 나갔고, 남은 교인들은 한영선 목사를 중심으로 전도운동에 나서 아현여학교 부지를 여선교부로부터 이양 받아 새로운 예배당을 마련하는 등 교회 부흥에 나섰다. 1965년 김지길 목사가 부임한 후 아현교회를 안정적으로 이끌었다. 김지길 목사는 1949년 감독으로 선출된 김유순 목사에 이어 1979년 두 번째로 아현교회가 배출한 감독이 되었고, 신경하 목사는 아현교회 출신 세 번째 감독이었다. 1970년대 이후 아현교회는 성장을 이루며 사회선교활동을 포함한 다양한 선교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국내교회 개척과 해외선교에도 앞장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