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제일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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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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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강원도 영서지방에 최초로 설립된 기독교대한감리회 동부연회 원주서지방 소속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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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05년 강원도 영서지방에 최초로 설립된 기독교대한감리회 동부연회 원주서지방 소속 교회.
연원 및 변천

개신교의 강원도 선교는 원산으로 파송 받은 미국 남감리회 소속의 하디(R. A. Hardie) 선교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하디는 동해안을 따라 선교 사업을 확대할 계획을 세우고, 1900년 강원도에서는 처음으로 김화 지경터 교회를 설립하였다. 이후 김화를 중심으로 양양·강릉·평해·울진 등으로 교회설립이 확산되었다. 영서지방에는 무스(J. R. Moose)와 콜리어(C. T. Collyer) 선교사가 개척을 시작하여 춘천·홍천에 교회가 세워졌다. 무스 선교사는 조사(助事) 장의원과 함께 원주에서 전도활동을 시작하여 그 결과 1905년 4월 15일 본부면 상동리 풀밭에서 5~6명의 남자 교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원주제일교회(당시 원주읍교회)의 시작이다.

창립 초기에는 교인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으나, 선교부의 보조를 받아 현재 일산동에 해당되는 상동리 115번지에 4간 반 초가집 한 채를 구입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다. 1906년부터 원주지역이 북장로회의 선교구역으로 넘어감으로써 원주제일교회는 장로교회로 전환되어 클라크(C. A. Clark) 선교사의 지도를 받았으며, 1909년에는 원주지역이 다시 북감리회 선교구역으로 바뀌게 됨에 따라 원주제일교회는 데밍(C. S. Deming) 선교사가 관할하게 되었다. 남감리회에서 북장로회, 다시 북감리회 소속으로 변화를 겪은 원주제일교회는 1910년 노블(W. A. Noble) 선교사가 원주 지역의 순행선교사, 권신일이 원주제일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안정되었다.

1914년에는 중등과정의 교육기관인 남녀공학 의정(義貞)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의정학교는 1917년 원주공립보통학교에 병합되었다. 1916년에는 정신(貞信)유치원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는데, 이것이 ‘원주유치원’의 모체이다. 이와 같은 교회의 양적 성장과 선교사업의 확대 속에서, 1916년에는 해외와 국내의 보조금으로 2층 붉은 벽돌 예배당을 신축하였으며, 1924년에는 한국에서 세 번째로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했다.

일제 말기에는 교회종이 전쟁물자로 징발되고, 한국전쟁 발발 직후 예배당이 전소되는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전시 중에도 교인들은 다시 모여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리는 한편 원주로 몰려드는 피난민들을 위해 1952년 말 학성동에 예배처를 마련하고 이를 ‘원주제이교회’로 명명하였다. 원주읍교회는 이때부터 ‘원주제일교회’로 불리게 되었다.

천막 시대를 끝내고 석조 건축물의 몸체에 한옥 기와집 양식의 종각을 얹은 단층 예배당을 1955년 11월 준공하였다. 1965년에는 교육관 2층을 건축하고 교회창립 60주년 기념예배를 드렸으며, 1975년 창립 70주년에는 구예배당 석조 건축물 일부를 남기고 예배당을 개축하여 봉헌하였다. 원주제일교회는 교회 성장에 맞추어 다시 교회창립 90주년 기념 성전으로 지하 1층, 지상 3층 높이의 건축물을 지어 1995년 4월 16일 창립 기념 주일에 봉헌하였다. 선교 초기 강원도 영서지역 복음전도의 중심축이 되었던 원주제일감리교회는 만종교회를 시작으로 문막제일교회 설립에 이르기까지 국내에 모두 20개의 지(支)교회를 개척하였다. 해외선교에도 힘을 쏟아 1996년 필리핀 페냐플랑카 교회, 1997년 인도네시아의 와링하르조 교회를 시작으로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 모두 20개의 교회를 설립하였다. 역대 담임 목회자 중에 신홍식 목사는 3·1운동 민족대표의 한 사람이었고, 송득후 목사 역시 평양의 3·1운동과 관련하여 옥고를 치룬 민족주의자였다.

참고문헌

『원주제일교회 100년사』(원주제일교회 역사편찬위원회, 기독교대한감리회 원주제일교회, 2005)
「조선감리교회약사 원주읍교회」(『감리회보』193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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