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 경상남도 마산의 여(余)씨 가문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러나 “집에서 키우면 일찍 죽는다.”는 점괘에 겁을 먹은 그의 부모에 의해 스크랜턴 대부인(M. F. Scranton)에게 맡겨졌다. 여메례는 스크랜턴 대부인이 설립한 기숙학교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며 세례를 받았고, ‘메리’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메례(袂禮)는 메리의 한자 음역이다.
홀 부인(R. S. Hall)에게 간호 지식을 배워 여성 전용병원인 보구여관(普救女館)에서 간호사 겸 전도부인으로 근무하던 중 황씨 성을 가진 남성과 결혼하였고, 이때부터 서양식 전통을 따라 ‘황메례’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황메례의 결혼생활은 너무 짧았다. 그의 남편 황씨는 결혼 직후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1899년 보구여관이 동대문으로 이전하자 모교인 이화학당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학생 자치단체인 ‘러빙 소사이어티’(Loving Society)를 조직하고 규칙을 세워 학생들이 자기훈련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을 견지할 수 있도록 지도하였다.
1903년 일본 교육기관을 시찰한 후 한국에서 근대교육을 위한 기반의 확보가 필요함을 절감하고 상동교회 주일학교에서 성경과 영어를 가르치는 한편, 수원의 삼일여학교에까지 가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마침 상동교회에서 가르치던 학생 중에 엄비(嚴妃)의 사촌동생 되는 엄준원의 딸이 있었다. 엄비의 뜻을 따라 근대식 여학교를 설립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엄준원은 황메례를 엄비에게 소개하였고, 엄비와 황메례의 만남을 통해 근대식 여학교 설립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1906년 4월 21일 자하골(현 창성동)에 개교한 진명여학교 교장에 엄준원이 취임하였고, 황메례는 학감을 맡아 실질적인 학교운영을 담당하였다. 황메례의 활동은 진명여학교의 교육사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영어에 능통했던 그는 어전통역관으로 활동했으며, 전국을 순회하며 여성계몽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1910년 진명여학교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게 되자 그의 교육활동은 중단되었다.
교육현장에서 쫓겨난 황메례는 한동안 방황하다가 배재학당 출신의 양홍묵(梁弘默)과 재혼하였다. 양홍묵은 독립협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협성회회보』와 『매일신문』을 발행한 애국계몽운동가였다. 양홍묵과 결혼하며 그의 이름이 ‘황메례’에서 ‘양메례’로 바뀌었다. 그러나 양홍묵과의 결혼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정부의 관리인 남편의 임지를 따라 김해, 청도, 경주 등으로 옮겨 다녔던 양메례는 남편과 사별한 후 남편의 전처소생인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남편의 고향인 충청북도 청원군 부강에 정착하였다. 부강에는 교회가 없었는데, 여메례가 동양선교회(성결교회) 선교사 킬보른(E. A. Kilbourne)과의 만남을 계기로 자신의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부강성결교회가 시작되었다.
여메례는 킬보른의 권고로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 수업을 받기 시작하였다. 1923년 성서학원을 졸업한 후 여자부 부사감이 되어 여학생들의 생활지도를 하였고, 1925년부터는 교수가 되어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으며 1929년에는 여자부 사감이 되었다. 1931년 여메례는 사감직을 사임하고 청주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여 목회를 시작하였다. 1932년 성서학원 제자인 김정호 목사가 담임하고 있던 조치원교회로 옮겨 전도사로 시무하던 중 1933년 2월 27일 사망하였다. 현재 부강교회에 ‘여메례전도사기념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