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장로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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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신학교의 신학사상을 계승한 한국 장로교의 한 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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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조선신학교의 신학 사상을 계승한 한국 장로교의 한 교단이다. 1946년 조선신학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남부총회에서 총회직영 신학교로 인정을 받았다. 평양신학교는 개교가 불투명해지자 학생들이 조선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평양신학교의 학생들은 장로교의 보수정통주의 신학을 지키기 위해서 1947년 제33회 총회에 조선신학교의 신정통주의를 비판하는 호소문을 제출하였다. 1953년 분립을 선언한 평양신학교 계열은 1954년 제39회 총회에서 ‘대한기독교장로회’로 총회 명칭을 개칭하였다. 1961년(제46회 총회)에 지금의 ‘한국기독교장로회’로 변경하였다.

키워드
정의
조선신학교의 신학사상을 계승한 한국 장로교의 한 교단.
개설

대한예수교장로회와 함께 한국장로교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개신교단이다. 조선신학교 사건(지금의 한신대학교)을 계기로 1953년 대한예수교장로회로부터 분립을 선언하였다. 김재준, 장준하, 안병무, 서남동, 문익환 등 종교계를 비롯하여 사회개혁과 민주화, 인권, 통일운동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연원 및 변천

1946년 조선신학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남부총회에서 총회직영 신학교로 인정을 받았으나 평양신학교는 개교가 불투명해지자 평양신학교의 학생들이 조선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신학교의 신학적 입장은 자유주의 신학을 극복한 신정통주의 신학이었다. 평양신학교의 학생들은 이러한 학교의 신학사상과 교육내용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1947년 제33회 총회에 호소문을 제출했다. 그 핵심 내용은 조선신학교의 신학이 성서문자 무오설을 부인하는 19세기 극단적인 자유주의 신학이므로 장로교의 보수정통주의 신학을 지키기 위해서 조선신학교의 신학사상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1948년 제34회 총회에 조선신학교 이사진과 교수진의 총퇴직이 건의되었으나, 총회에서 이 건의가 부결되자 반(反) 김재준파(金在俊派), 곧 평양신학교 계열은 박형룡(朴亨龍)을 중심으로 장로회신학교라는 명칭의 새 신학교를 건립하였다. 제35회 총회(1949년)는 이 신학교를 총회직영 신학교로 또 인허하고 아울러 두 신학교의 합동안도 통과시켰다. 합동안은 ① 신학교육은 순복음주의에 기초하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조를 준수할 것, ② 양교 교직원은 총퇴직할 것, ③ 교장은 한인 가운데 원로목사가 맡을 것, ④ 교수 구성은 북장로교 선교사 중에서 3인, 남장로교 선교사 중에서 2인, 캐나다와 호주 선교사 중에서 각 1인씩 선임하며 이들이 신학의 주요 과목을 맡고 한인 중에서 약간 명을 교수로 선임하되 남은 과목을 맡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신학교 측에서는 ① 양교 교직원은 무조건 합동한다. ② 교장 · 교수의 선임은 선교사 · 한인 구별없이 자격있는 자를 이사회에서 이사회에서 선임한다는 내용의 합동안을 제출하자 총회의 합동안의 통과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한국장로교회가 성서관의 차이로 격렬한 논쟁을 하고 있었을 때,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교장인 맥카이(John A. MacKay)와 세계적인 신학자 브루너(Emil Brunner)가 내한하여 한국교회에게 복음적인 깊이와 세계적인 신학적 안목을 가질 것을 역설하고 축자영감설과 성서문자 무오설은 성서를 우상화한다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1951년 6 · 25전쟁 중에 부산에서 속개된 제36회 총회는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박형룡파)의 총회 인허를 공히 취소하고 노회의 수의도 거치지 않은채 대구에 제3의 신학교 건립을 위법적으로 통과시켰다. 이 학교의 교장은 선교사 김부열이 맡고 박형룡은 교수가 되었다. 1952년 제37회 총회에서 수적으로 우세하게 된 평양신학교 계열은 한국신학대학(조선신학교의 개명)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 ① 이 대학 졸업생들에게는 교역자 자격을 부여하지 않으며, ② 김재준의 교수직을 박탈하고 그가 속해 있는 경기노회로 하여금 그를 목사직에서 제명하도록 하였다. 또한 ③ 성서축자영감설을 부인한 캐나다 선교사 서고도(Scott,W.M., 徐高道)를 처벌했으며, ④ 한신측의 사상을 찬성, 지지하는 자는 해당 노회로 하여금 처단하도록 했다.

이러한 결의에 항거하고 비판하는 소리는 모두 묵살되었고, 경기노회가 김재준을 제명할 이유가 없다고 제38회 총회에 보고하자 총회는 일방적으로 김재준의 파직을 선언하였다. 이와 같은 불법적인 결의의 시정을 김세열 외 80명이 호소하였으나 모두 묵살되어 한국신학대학교 지지자들은 총퇴장하였다. 이후 이들은 1953년 서울 동자동 한국신학대학 강당에서 제38회 호헌총회를 소집하여 총회장에 김세열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제36 · 37회 총회 결의를 모두 불법으로 규정하고 한국장로교 총회를 정당하게 계승함과 아울러 발전시킬 것을 선언하였다.

새 총회는 옛 총회가 헌법과 통용규칙을 유린했고 신앙양심을 억압하며 당파적 고집으로 한국장로교회를 혼란에 빠뜨렸다고 규탄하면서 새 총회의 소신과 지도이념을 천명하였다. 그 내용은 ① 우리는 온갖 형태의 바리새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복음의 자유를 확인한다. ② 우리는 전 세계 장로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건전한 교리를 수립함과 동시에 신앙 양심의 자유를 확보한다. ③ 우리는 노예적인 의존사상을 배격하고 자립자조의 정신을 함양한다. ④ 그러나 우리는 편협한 고립주의를 경계하고 전 세계 성도들과 협력, 병진하려는 세계교회 정신에 철저하려 한다는 것 등이었다.

새 총회는 1954년 제39회 총회에서 ‘대한기독교장로회’로 총회 명칭을 개칭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와의 혼돈을 피하기로 하였으며, 이 명칭은 1961년(제46회 총회)에 지금의 ‘한국기독교장로회’로 변경되었다. 1954년에 목포노회가, 1955년에 전남 · 경남노회가, 1956년에 경기 · 충북 등이 새 총회에 가입하여 총회의 기틀을 잡아갔다. 1956년 새 총회는 종래의 선교부 제도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그 결과 1957년 제42회 총회는 한국교회 선교역사상 처음으로 외래선교사업을 한국교회 총회가 관장하게 하였다. 1956년에 부목사와 여장로제도, 1974년(제59회 총회)에 여목사제도, 1984년에는 생활보장제를 처음으로 채택하여 진보적인 교단으로서의 면모를 제도면에서 보였다. 새 총회는 세계장로교회의 전통에 따라 에큐메니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57년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 가입하는 것을 비롯하여 1958년에는 한국기독교세계봉사회(KCWS)에, 1959년에는 동남아기독교대회(EACC, 현재는 아시아기독교대회, CCA), 세계장로회연맹(현재의 세계개혁교회연맹, WARC), 대한기독교교육협회(KCCE)에, 1960년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입하여 세계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또한 1974년에 독일 서남지구교회 및 선교협의회(EAS), 1976년에 백림선교협의회(BMW), 1980년에 스코틀랜드교회, 1982년에는 뉴질랜드 장로교회, 1983년에는 미국연합교회 등 세계 각 교회들과 선교협력관계를 계속 확대해 나감으로 선교지역을 세계로 넓혀 나갔다.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세계적으로도 한 교단의 위치를 다져감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내적으로 총회의 규칙, 정치를 1962년까지 최종적으로 수정, 공포함으로써 단일 교파로서 조직을 정비해갔다. 그리고 교단의 이념과 입장을 보다 심화시키고 실천하기 위해서 「교회교육정책」(1969) · 「교회교육지침서」(1970) · 「사회선언지침」(1971) · 「신앙고백선언서」(1972) · 「선교정책」(1973)을 채택 발표하였는데, 이와 같이 한국교회가 독자적인 신앙고백을 제정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현황

2020년 현재 28개 노회, 1600여개 교회, 124개 시찰위원회, 30만여 명의 교인이 있으며, 교육기관으로는 영생고등학교, 한신대학교,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기독교100년사』(책임집필, 주재용,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1992)
「한국기독교장로회 연혁·정책·선언서」(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1974)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홈페이지 (http://www.prok.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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