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준 ()

개신교
인물
해방 이후 『낙수』, 『요한계시록 주석』, 『황야에 외치는 소리』 등을 저술한 신학자이자 목사, 재야 민주화운동가.
이칭
장공(長空)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1년 9월 26일
사망 연도
1987년 1월 27일
출생지
함경북도 경흥
주요 저서
『낙수 落穗』, 『요한계시록주석』, 『황야에 외치는 소리』, 『범용기 凡庸記』
주요 경력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 한국신학대학 이사장, 국제앰네스티한국위원회 위원장, 1973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공동의장, 북미주한국인권수호협의회 의장
대표 상훈
국민훈장 무궁화장
관련 사건
이방돈 단권주석 사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김재준은 해방 이후 『낙수』, 『요한계시록주석』, 『황야에 외치는 소리』 등을 저술한 신학자이자 목사, 재야 민주화운동가이다. 대표적인 자유주의 기독교 지식인으로 분류된다. 아빙돈 단권 주석 사건과 같은 자유주의 신학 논쟁의 중심 인물이며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제명 처분은 1953년에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창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1965년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참여한 이래 재야인사로서 한국의 민주화 통일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정의
해방 이후 『낙수』, 『요한계시록 주석』, 『황야에 외치는 소리』 등을 저술한 신학자이자 목사, 재야 민주화운동가.
인적사항

1901년 9월 26일 함경북도 경흥군 상하면 오봉동 창꼴마을에서 아버지 김호병과 어머니 채성녀의 2남 4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8년 장분여와 결혼하여 3남 3녀를 두었다. 1987년 1월 27일 서울 한양대학교 부속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주요 활동

1923년 중동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후 1924년 김익두(金益斗)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에 주1. 1928년 일본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신학부를 졸업하였다. 같은 해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신학교를 거쳐 1932년 웨스턴신학교에서 구약학(舊約學)으로 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33년부터 평안남도 평양 숭인상업학교 성서 교사 겸 교목으로 있으면서 평양장로회신학교의 기관지 『신학지남(神學指南)』주2 시작하였는데, 신복음주의적인 신학 논문 발표로 한국 신학의 자유로운 발전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1935년의 ‘아빙돈 단권 주석 사건’ 이후 『신학지남』에는 더 이상 글을 싣지 못했다.

1936년 8월부터 간도 용정(龍井)의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강원룡(姜元龍) · 안병무(安炳茂) 등을 가르쳤다. 1940년 4월 새로 세워진 서울의 조선신학원(현, 한국신학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1945년 경동교회를 창설하여 목회도 하였으며, 1947년 신학 노선 문제로 정통 시비에 휘말리다가 1952년 대한예수교장로교총회에서 제명되었다. 1953년 이에 반발한 교회들의 한국기독교장로회 창립에 따라 이 교단의 주도적인 신학자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58년 캐나다의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에서 명예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61년 한국신학대학 학장을 거쳐 1963년 10월 정년 퇴임과 함께 명예 학장으로 주3 그 뒤에 1965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 1969년 한국신학대학 이사장을 맡았다.

1937년 5월 간도에서 『십자군』을 창간하였는데, 2년만에 중단되었다가 1951년 다시 주4 제36호까지 발간하였다. 『제3일』은 1970년 9월부터 1974년 5월까지 정기 간행으로 제45호까지 발간하였는데 5·16군사정변 이후의 공화당 정권에 향해 도전하고, 사회 참여와 민주화 주5을 주장하였다. 실제로 1965년의 한일굴욕외교 반대투쟁 때부터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깊숙히 참여하였다.

1969년 3선 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위원장, 1972년 국제앰네스티한국위원회 위원장, 1973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공동 의장으로 일했다. 1974년 3월 12일 민주화 운동의 국제적 확대를 목표로 캐나다로 이주하였다. 그해 한국 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미주 본부 의장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1975년 북미주한국인권수호협의회 의장, 1978년 북미주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 연합 위원장, 1982년 한국민주촉진국민연합 고문 등으로 활약하다가 1983년 귀국하였다.

2016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통합)는 공식적으로 김재준 목사의 제명 결의를 철회하고 사과하였다.

사상과 작품

대표적인 주6 기독교 지식인으로 분류된다. 자유를 인간 본성 자체로 보았으며 그 근거를 하나님의 형상에서 찾았다. 따라서 자유가 상실된 상태를 죄로 보았으며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정권에 대해서는 저항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주7를 넘어 교회의 정치적 사회 참여와 책임을 옹호하였다. 그가 추구한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는 인간의 내적 자유와 외적 자유가 총체적으로 보장되는 것이었다.

1960년대 후반 세계 신학계의 주요 주8인 ‘인간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인간의 모든 구조악으로부터의 해방, 인간 실존 전 조재로서의 구원, ‘인간 완성’을 주장하며 인간 존엄의 보존을 중요시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낙수 落穗』(1953) · 『요한계시록 주석』(1968) · 『황야에 외치는 소리』(1983) · 『범용기 凡庸記』(1983)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88년 ‘장공 김재준 목사 주9’가 조직되었다. 기념사업회는 장공기념강연회, 장공장학사업, 장공 추모 예배 등의 기념 사업을 관장하고 있다. 2002년 12월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주어졌다.

참고문헌

단행본

고지수, 『김재준과 개신교 민주화운동의 기원』 (선인, 2016)
김경재, 『김재준 평전』 (도서출판 삼인, 2001)

논문

고지수, 「냉전기 한 자유주의자의 '저항' 담론 형성과 분단 사유: 김재준의 경우」 (『통일과 평화』 12-2,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2020)
고지수, 「1970년대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미주본부」의 ‘선 민주·후 통일’ 노선과 자유연합 -김재준의 의장활동을 중심으로-」 (『역사학연구』 80, 호남사학회, 2020)
김동환, 「김재준의 정치사상」 (『신학사상』 164, 한신대학교 신학사상연구소, 2014)
주석
주1

세상에서 떳떳한 자리를 차지하고 지위를 확고하게 세우다. 우리말샘

주2

신문, 잡지 따위에 싣기 위하여 원고를 써서 보내다. 우리말샘

주3

윗사람으로 떠받들어지다. 우리말샘

주4

간행이 중단되었던 신문이나 잡지 따위가 다시 계속하여 간행되다. 우리말샘

주5

‘민주화 운동 관련자 명예 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서, 1964년 3월 24일 이후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여 헌법이 지향하는 이념 및 가치의 실현과 민주 헌정 질서의 확립에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ㆍ신장시킨 활동. 우리말샘

주6

17~18세기에 주로 유럽의 신흥 시민 계급에 의하여 주장된 시민적ㆍ경제적 자유와 민주적인 여러 제도의 도입을 요구하는 사상이나 운동. 로크, 루소, 벤담, 밀 등이 주창하였으며, 미국과 프랑스 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우리말샘

주7

국가가 종교적 중립성을 유지하여 정치권력과 종교를 결부하지 아니함. 우리말샘

주8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논의함. 우리말샘

주9

어떤 뜻깊은 일이나 훌륭한 인물 등을 오래도록 잊지 아니하고 마음에 간직하기 위하여 벌이는 사업을 담당하는 단체.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손승호(한국기독교역사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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