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경기도 양주 출신. 호는 일가(一家). 1930년 광동학교(廣東學校) 졸업 후, 1931년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기독교 농민운동의 뜻을 품고 귀국하였다. 1938년 경기도 양주시 와부면 능내리에 ‘봉안 이상촌’을 만들어, 기독교 사회주의 실현을 위하여 힘썼다.
이상촌에서는 공동생활형태를 취하면서 가축부업을 의무화하고, 협동조합·소비 공매 조합 등을 결성하여 농민의 권익을 도모하는 한편, 금주·금연, 관혼상제 간소화운동도 전개하였다. 1942년 ‘고구마 12개월 저장방법’을 개발하여 농가소득에 기여하였다.
1944년 10월 용문산 부근 농민들을 중심으로 농민동맹을 결성하고 일제의 공출(供出)과 징용·징병에 저항하는 운동을 전개할 때 여운형(呂運亨)도 참여하였다.
1946년 경기도 고양시 은평면 구기리에 교회(지금의 임마누엘수도원)와 농장을 건설하였고, 1950년 경기도 용인에 복음고등농민학교를, 1954년에는 광주에 가나안농장을 설립하였다.
1962년 가나안농군학교를 세워 본격적인 기독교 농촌지도자교육을 시작하였으며, 1973년 강원도 원주에 제2가나안농군학교를 설립하였다.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이상적인 농촌사회건설과 지도자양성에 헌신한 공로로 1962년 제1회 향토문화공로상, 1966년 막사이사이상(사회공익 부문), 1973년 제1회 인촌문화상을 수상하였다.
1978년 필리핀 세이비어 대학에서 명예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82년 3월 농촌후계자양성을 위한 가나안농군사관학교를 설립, 독특한 교육방법으로 복음사업과 아울러 농촌운동지도자를 배출하였다.
저서로 『참 살길 여기 있다』·『가나안으로 가는 길』·『심는 대로 거두리라』·『이렇게 살 때가 아닌 가』·『그분의 말씀 따라』·『조국이여 안심하라』·『나의 한길 60년』·『영광된 내일을 위하여』등이 있다.
1990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일가상(一家賞)을 제정하고, 매년 농민운동·협동조합운동 등 사회공익실현운동에 공로가 큰 사람에게 시상하고 있다.